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덕장(德璋), 호는 청단(淸湍). 할아버지는 현극소(玄克昭)이고, 아버지는 호군 현효생(玄孝生)이며, 어머니는 이비(李芾)의 딸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손녀사위이다.
1453년(단종 1)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집경전직(集慶殿直)에 제수된 뒤 수 차례 자리를 옮겨 내섬시직장을 역임하였다. 1460년(세조 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감찰에 이어 개성부도사·성균관직장·형조도관정랑(刑曹都官正郎)·예조정랑·중추부경력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사인으로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의 편수에 참여하였다. 1472년 집의로서 언사(言事)를 활발히 전개하고, 경연에도 참여하였다. 1474년 동부승지에 발탁되고, 이듬해 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1477년 승지들 간의 불화로 좌승지 임사홍(任士洪), 우승지 한한(韓僩), 좌부승지 송순효(孫舜孝)가 문책되면서 체직(遞職: 벼슬을 갈아 냄.)되었으나, 성종의 신임으로 유임되었다. 이어 대사헌으로 승진했으나, 대간들이 그 부당함을 논하였다. 그러자 3일 후에는 형조판서로 승진되었고 다시금 대간들의 소가 쏟아지면서 결국 지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
1478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그 해 평안도관찰사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자 백성들이 유임을 청해 1년간 더 재직하였다. 이듬해 윤필상(尹弼商)을 도원수로 한 여진 정벌에 부원수로 차출된 김교(金嶠)를 대신해 병마절도사의 직임까지 수행하였다. 1480년 유진장(留鎭將)으로서 건주위(建州衛) 정벌에 공을 세워 우참찬이 되었다.
성품이 정직·청렴해 매사에 공의를 주장했고, 명석한 판단으로 공사(公事)를 처리하는 등 성종 초의 정치에 공헌하였다. 시호는 정경(貞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