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률사(協律社)는 1902년 고종 재위 40주년 경축의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당시 한성부 야주현(漢城府 夜珠峴:현재의 광화문 새문안교회 자리)에 있었던 황실건물 봉상사(奉常寺)의 일부를 터서 설립하였으며, 2층 500석 규모의 상설극장이다.
이 극장에는 경축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기 위하여 전국의 판소리 명창(名唱)·가기(歌妓)·무동(舞童) 등 170여 명을 모아 전속단체를 만들었고, 대표는 명창 김창환(金昌煥)이 맡았다. 이들은 관급(官給:나라에서 주는 돈)을 받으면서 연희를 연습하였으나, 그 해 여름 경축 예식이 콜레라의 만연과 영친왕(英親王)의 병 등의 이유로 간략하게 치러지자 협률사는 이후 대중적인 연희장으로 변모하였다.
1902년 11월에 협률사(協律司) 소속에서 협률사(協律社)란 독립적인 명칭을 갖게 되었고, 1902년 12월 2일에 창립공연작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유료 무대공연인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가 공연되었다. 「소춘대유희」는 특정작품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기녀들의 춤과 판소리, 명창들의 판소리, 재인(才人)들의 곡예 등 전통연희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공연이었다. 그러나 1903년 2월 부터 배우들의 공연이 중지되고 기생들의 예능만이 공연되었다.
1903년 여름, 영화 상영 중 전기 파열로 불상사가 일어나 문을 닫았다가 대중의 요구로 다시 문을 열었다. 1904년에 또다시 문을 닫았다가 1906년 초에 다시 문을 열었다.
이 때는 협률사의 소관이 참령 장봉환(張鳳煥)에서 궁내부 참서관 김용제(金容濟)·최상돈(崔相敦)·고희종(高羲綜) 등에게 넘어갔다. 이 곳은 일본인이 출자하여 임대 형식으로 운영되었으며, 당시 대중들의 연희장 겸 사교장 구실을 하면서 사회 풍기문제를 계속 일으킴으로써 보수 관료층의 분노를 사고 언론의 공격을 받았다. 이로써 1906년 4월 17일, 결국 봉상시(奉常寺) 부제조(副提調)였던 이필화(李苾和)가 협률사 폐지를 요청하는 상소문을 고종에게 올림으로써 3년 6개월만인 1906년 4월 25일 문을 닫았다. 이 건물은 2년 뒤에 원각사(圓覺社) 극장으로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협률사는 개화기의 대표적 극장으로서 대중들에게 판소리 다섯 마당과 가기·무동의 춤과 노래 등 전통연희공연을 통하여 오락을 제공한 긍정적 측면 외에, 옛날부터 사찰을 근거지로 삼고 활동하던 공인(工人)·예인(藝人)·중광대(僧廣大) 등의 연희활동을 금지함으로써 전통예술의 맥을 끊게 한 부정적 측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