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생. 종로구 당주동 즉 야주개(夜珠峴) 골목에서 태어났다. 은행가이던 부친 형의택(邢義澤)과 모친 박씨(朴氏) 사이의 6남매 중 막내로 자랐다. 경성사범학교부속보통학교를 졸업했고, 「당나귀」(한일동 작시)라는 동시에다가 곡을 만들어 조선일보 지면에 발표하기도 했다.
소년 형석기가 음악에 눈뜨게 한 사람은 그의 삼촌으로 그는 바이올린 연주가 취미였다.
서양음악에 본격적으로 몰입한 것은 동경중앙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이왕직 아악부 출신인 이종태(李鍾泰)에게 피아노를 사사받을 때부터였다. 그의 나이 21세 되던 해, 이종태의 권유로 일본에 유학하여 동양음악학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수업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형석기는 이종태의 소개로 포리돌레코드사에서 민요가수 선우일선(鮮宇一扇)에게 「조선팔경가(朝鮮八景歌)」를 취입시켰다(1936년 왕평(王平) 작사). 1939년에는 이 곡을 재발매하며 「조선팔경」이라고 했고, 8·15광복 이후 서울에서는 「대한팔경(大韓八景)」이라고 했다. 민요풍의 노래는 대개 굿거리장단(세마치장단)인데 그는 명랑한 가요풍의 두마치장단으로 구성했다.
1938년 이후 빅타레코드사에서 박단마(朴丹馬)의 노래 「아이고나 요 맹꽁」(이부풍 작사), 한정무(韓正戊)의 노래「대동강 달밤」 등도 발표하였다. 1943년 초 반도가극단의 상연작품인 향토가극 「심청전(沈淸傳)」(서항석 작·연출)에서 60여 곡을 작곡하였다.
안기영(安基永)과 함께 향토가극 작곡가로 쌍벽을 이루고 있던 그는 1944년 가극 「화랑도(花郞道)」(서항석 구성·연출), 1945년 8월 가극 「상국(相國))을 작곡했다. 출연진은 음악학교 출신인 이규남·임천수(林千壽) 등이었다.
1946년 서림(徐林) 작 「원수의 38선(線)」, 1947년 가극 「7공주」·「계월향(桂月香)」, 1948년 향토가극 「거지왕자(王子)」, 나도향의 소설 「물레방아」를 가극화하여 「물레방아 사랑」으로 상연하였다. 1951년 부산에서 「선화공주(善化公主)」·「바보 온달」 등을 발표했다.
1964년 민간방송 출연 이후 예그린악단 출신 여가수 김수연(金水燕)이 노래한 「뱃노래」·「돌아라 물레야」 등을 남긴 그는 일본 가요인 소위 엔카조(演歌調)의 노래는 그다지 많이 작곡하지 않았던 작가이다. 광복 직후 한때 경복중학교에서 음악교사로 교편을 잡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