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한나라 사람이었는데, 무리 1,500명과 함께 벌목을 하다가 한(韓)의 습격을 받아 붙들려와 머리를 깎이우고 노예가 되었다.
왕망(王莽) 지황(地皇)년간(서기 20∼22)에 진한의 우거수(右渠帥)가 된 염사치(廉斯鑡)가 낙랑(樂浪)의 토지가 아름답고 인민이 풍요롭게 산다는 말을 듣고 도망하여 투항하러 갈 때, 호래는 밭에서 참새를 쫓는 일을 하다가 만나 염사치를 따라 길을 떠나 함자현(含資縣)에 이르러 그간의 사유를 말하였다.
이를 현에서 군(郡)에 보고하였다. 이에 군에서는 큰배를 타고 진한에 들어가 호래와 함께 붙들려 항복한 무리 1,000명을 돌려받고, 이미 죽은 500명에 대해서는 진한인 1만5000명과 변한포(弁韓布) 1만5000필을 대가로 받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