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재침략을 감행한 일본군이 호남지방에 쳐들어왔을 때 도내 각처에서는 지역별 의병항쟁이 계속되었고, 부안·흥덕(興德) 일원에서도 해안지역에 침투한 일본군들과의 전투가 치열하였다.
그 해 3월 하순부터 4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흥덕의 배풍령(排風嶺)·장등원(長嶝院) 및 부안의 호벌치에서 펼쳐진 의병의 항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흥덕에서 이미 의병을 일으킨 채홍국(蔡弘國)과 평강채씨(平康蔡氏) 문중 인사들은 당시 그들의 인척과 가동(家偅)을 총동원하여 전라도 순천지방까지 진출, 의병활동을 전개한 바 있었다.
그 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지난날의 조직을 재정비하여 향리를 거점으로 한 의병활동을 재개하였다. 이때의 의병조직에는 고부 만일사(萬日寺) 주지를 중심으로 인근 사찰의 많은 승려들이 가담, 함께 활약함으로써 군세(軍勢)를 보강하였으나 수백의 병력으로 막강한 일본군을 저지할 수가 없었다.
특히, 4월 중순 이후 약 1주간에 걸쳐 계속된 호벌치전투에서는 의병장 채홍국 3부자는 물론, 흥덕의병 대부분이 전사하는 일대 혈전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부안·흥덕일대는 결국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의병이 적을 격퇴하지는 못하였으나 무명의 향촌선비들과 농민·천민·승려계층이 하나로 결합, 최후까지 침략군에 대항하여 싸운 의병항쟁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