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것으로 호구 파악, 유민 방지, 역(役)의 조달, 신분 질서의 확립, 향촌의 안정 유지 등을 통한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그 유래는 고려 말 1391년(공양왕 3)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계청에 따라 군정(軍丁)에게 이를 패용하게 한데서 시작되었다. 이는 원나라의 제도를 참작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398년(태조 7) 이래 이의 실시에 대한 논의가 꾸준히 제기되었다. 그러다가 1413년(태종 13) 9월, 전 인녕부윤(前仁寧府尹) 황사후(黃士厚)의 건의를 받아들여 먼저 호패사목(號牌事目)을 작성하고, 이에 따라 실시하였다. 호패제는 그 뒤 지속적으로 실시되지 못하고 여러 차례 중단되었다.
그 치폐 과정(置廢過程)을 보면, 1416년(태조 16) 6월 폐지, 1459년(세조 5) 2월 실시, 1469년(성종 즉위) 12월 폐지, 1610년(광해군 2) 9월 실시, 1612년 7월 폐지, 1626년(인조 4) 1월 실시, 1627년 1월 폐지, 1675년(숙종 1) 11월 실시 등의 변천을 겪으면서 고종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와 같이 호패제 실시가 때때로 중단되었던 것은 유망(流亡)이 감소되지 않았고, 양인(良人)들은 호패를 받으면 과중한 각종 국역(國役)을 부담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호패 받기를 기피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세력가에 위탁함으로써 양인의 수가 오히려 감소되었다.
이때 호패 폐지론자들은 위조패(僞造牌) · 무패(無牌) · 불개패(不改牌) · 불각패(不刻牌) · 실패(失牌) · 환패(換牌) 등 호패법을 위반하는 자에 대한 치죄(治罪)로 형옥(刑獄)이 번거롭고, 이에 따라 민심이 소란한 점 등을 들어 국가에 무익하다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반면 호패 실시론자들은 도적 및 백성의 유리(流離)를 방지할 수 있고 모든 백성의 신분과 직임을 밝힐 수 있으며, 호구를 장악해 군정을 확보할 수 있어 국가에 유익하므로 복구해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을 내놓았다.
한편 1461년(세조 7)부터 승인 호패제(僧人號牌制)가 실시되었다. 승인호패제는 세조의 호불책(護佛策)으로, 승형(僧形)을 가장한 유역인(有役人), 공사천(公私賤)의 피역(避役) 방지, 도첩(度牒)이 없는 승려에게 일정한 국역을 마친 뒤 도첩과 호패를 발급해 주려는 제도였다. 이 제도 또한 그 실시 과정에서 호패제의 치폐, 국가의 호불 · 억불책, 무도첩승에 대한 대책과 승형을 가장한 피역, 수로를 내거나 성지(城池) 수축 등을 위한 요역자(徭役者)의 확보책과 요역 부과에 대한 승려들의 반발 등과 관련해 여러 차례 치폐를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1469년(예종 1) 12월 폐지, 1536년(중종 31) 8월 실시, 1538년 12월 폐지, 1547년(명종 2) 2월 실시, 1550년 12월 폐지, 1610년(광해군 2) 실시, 1612년 폐지, 1626년(인조 4) 1월 실시, 1627년 1월 폐지 등의 변천을 겪으면서 운영되었다.
호패는 왕족 · 관인(官人)으로부터 양인 · 노비에 이르기까지 16세 이상의 모든 남자가 패용하였다. 그런데 그 재료, 기재 내용, 각인(刻印)의 위치, 주관 관서, 발급 순서, 호패법 위반자에 대한 처벌 규정 등은 신분이나 실시 시기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다. 이를 도식하면 〈표〉와 같다.
제분류\시기 | 전기 | 후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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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3년(태종 13) | 1459년(세조 5) | 1685년(숙종 11)이후 | |
형태 | 상원하방(上圓下方) | 상원하방(上圓下方), 상하방(上下方) | |
크기 | 길이-3촌7푼, 너비-1촌3푼, 두께-2푼 | 길이-3촌5푼~4촌, 너비-1촌1푼~1촌5푼 | |
재료 | 상아-2품 이상 논각-4품 이상 황양목-5~6품 자작목-7품 이하 관원 잡목-서인 이하 | 상아-당상관 목-당하관 이하~천인 | 상아-동·서반 및 내관 2품 이상 각-3품 이하, 잡과등제자 황양목-생원, 진사 소목-잡직, 사서인(士庶人), 서리, 향리 대목-공사천, 가리(假吏) |
기재내용 | 관직-3품 이상 관직·성명·주소-산 관3품 이하 성명·주소·얼굴색·수염유무-서인 소속부대명·신장-시·산군관 역명(役名)·소속·관아·주인명·나이·주소·얼굴색·수염유무·신장-잡색인 | 관직(시·산·검교구분)-당상관 관직-3품 이하, 권무, 잡직 성명·본관-전함3품 이하, 유음자제, 성중관 주소·호주·섬영·나이·본관·얼굴모양-무음자제, 양인, 전함잡색군사, 잡직인, 공사천 등 | |
화인(火印) | 무-현직자 유-산관 이하 | 호패(뒷면)-시·산당상, 동서 반3품 이하∼9품 권무·잡직 한(漢, 앞 황서), 호패(號牌, 뒤)〈서울〉·고을명(앞), 호패(뒤)〈지방〉-논자, 전함 3품 이하, 제색인 | |
주무관서 | 호조 | 호조 | 호패청 |
발급과정 | 작패→한성부→착인→발급(작패가능자) 납목(納木)→한성부→작패→착인→발급(작패불능자) 〈이상 서울〉 작패→계수관(界首官)→착인발급 (작패가능자) 납목→계수관→작패→착인→발급(작패불능자) 〈이상 지방〉 |
정장 감고(正長監考)→수령→발급 | |
처벌규정 | 위조자-사형(처자는 노비로 영속) 발급기한을 넘긴 자-사형(처자는 노비로 영속) 패를 바치고 호패를 받지 않는 자-중형(重刑) 유이자(流移者)-감 1등 차용·대여자-감 2등 망실자-태형 후 재발급 관리소홀자-태형 유이자 단속을 못한 이장·수령과 무패자를 통과시킨 관율(關津) 관리-감 2등 |
개조·위조자-사형(처자는 노비로 영속) 차용·대여자-장 80 발급기피자-장 80 패를 소지하지 않은 자-태 50 망실자-태 50 발급기피·누락묵인 관리-율(律)에 따라 논죄 |
위조자-사형(처자는 노비로 영속) 패를 소지하지 않은 자-사형(처자는 노비로 영속) 남의 호패를 빌려 사용하는 자-사족은 정배, 평민은 충군, 공사천은 유비 |
기타 | 지패(紙牌)통용시기 : 1675년(숙종 1) 11월~1677년 3월 | ||
1677년 4월~1685년 1월 : 사대부는 각(角)·목(木)으로 된 호패, 평민은 지패 사용 | |||
〈표〉 조선시대 호패 일람 |
호패제가 처음 실시된 1413년(태종 13)부터 지속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한 1675년(숙종 1)까지의 260여 년 사이에 불과 18년간 실시되었다. 또한 그나마 『세종실록』에 호패를 받은 사람은 전체 인구의 1, 2할이라 하고, 『성종실록』에는 호패를 받은 사람 가운데 실제로 국역을 담당한 양인은 1, 2할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로써 보건대 이 제도는 별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