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태허(太虛). 홍귀해(洪貴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형(洪泂)이고, 아버지는 정랑 홍언광(洪彦光)이며, 어머니는 양윤(梁潤)의 딸이다. 영의정 홍언필(洪彦弼)의 조카이다.
1531년(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正字)·저작(著作)·설서(說書)·정언을 거쳐, 1546년(명종 1) 예조와 이조의 정랑, 1547년 장령·장악원첨정·응교를 역임하였다.
1548년 사간, 사복시와 사재감의 정(正), 집의가 되고 이듬해 예빈시부정·전한(典翰)을 거쳐, 1550년 직제학·동부승지, 1553년 호남관찰사,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좌윤·우윤, 형조참판을 지냈다.
1555년 한성부좌윤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부제학·도승지·대사간·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560년 영남관찰사·홍주목사, 형조와 공조의 참판, 1565년 함경도관찰사·지중추부사 겸도총관, 1568년(선조 1) 병조판서, 동지경연성균관사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조와 예조의 판서, 1574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좌참찬·영중추부사를 거쳐, 1576년 예조판서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한 뒤 지중추부사·우참찬에 이르렀다.
응교로 있을 때 진복창(陳復昌)이 윤원형(尹元衡)의 권세에 빌붙어 사사로이 중상모략을 하자 이를 막았다. 훈구파(勳舊派)의 거두로서 김개(金鎧)와 함께 정철(鄭澈) 등의 사림파와 대립하였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이 세워졌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