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 홍원출신.
개성상업학교 재학시 학우 김용호(金龍浩)·정철(鄭哲) 등과 함께 학생운동에 참가하였고, 1931년 4월 니혼대학[日本大學]에 입학, 1933년 2월 흑우연맹(黑友聯盟)에 가맹하여 한하연(韓何然)·홍성환(洪性煥)이 창립한 『자유코뮨』을 편집하였다.
1934년 에스페란토어로 소설 「농촌 개척자」를 『Aganto』라는 문학잡지에 연재하다가 학생사건에 관련되어 일본에서 추방되었다. 1937년 서울에서 무정부주의 운동의 학술단체인 조선에스페란토문화사를 창립하고 순(純)조선에스페란토어로 된 『Korea Esperantista』를 발행하였다.
이 단체는 시기적으로 볼 때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이후 조선에서 일체의 독립운동이나 사회운동을 허용하지 않고 탄압을 가하던 시기에 창립되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1939년 3월 일제의 탄압으로 에스페란토지(誌)는 폐간되었다. 최해청(崔海淸)과 함께 근로자 교육기관으로서 대구 청구대학(靑丘大學)을 육성하는 데 공이 컸으며, 1968년 대구에서 죽을 때까지 30여년간 우리나라 에스페란토어 발전에 공이 컸다.
전세계 아나키스트는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인류애와 평화주의를 근본이념으로 하는 에스페란토세계정신에 공명하여 신문·잡지에는 매양 에스페란토어란을 두고 그 보급에 힘쓰고 있었으니만큼, 그의 에스페란토어운동은 곧 코스모폴리탄적인 평화주의운동이었고, 각국의 아나키스트운동과의 연대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 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