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백곡리 고분 ( )

선사문화
유적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앞트기식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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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앞트기식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내용

남양반도(南陽半島)의 해안가 가까이에 있는 백곡리 행기실마을 뒤의 해발 90m 내외 야산 정상부 능선과 사면에 분포하고 있으며, 수원에서 서남쪽으로 약 30㎞ 떨어져 있다. 남양만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 해상 교통의 요지로 잘 알려져 있는 곳인데, 서신면 상안리에는 신라가 중국과의 해상 교통을 위한 거점으로서 중시하였다고 하는 당항성(黨項城)이 있다. 이 지역 일대는 해발 100m 내외의 야산이 발달하여 있는 곳으로서 유적의 서쪽에도 해발 250m의 야산이 해안을 병풍처럼 막아주고 있으며, 그 산 정상부에는 토성이 있다.

이 유적은 1971년도에 마을 주민의 신고로 김원룡이 조사하여 파괴된 무덤 5기를 확인하고, 이 중 1기에서 한성기의 백제토기 4점을 수습 보고하여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1991년에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다시 조사하여 봉분 흔적이 있는 것 12기를 확인하고 6기를 발굴하였는데, 이 중 4기(1·2·5·8호)의 조사 결과가 보고되었다. 12기 중 11기가 능선 정상부를 따라 남-북으로 분포하여 있으며, 1호분 1기만 서편으로 약간 떨어져 마을의 평지를 잘 굽어볼 수 있는 곳에 축조되어 있다.

이 고분들은 봉토가 얕지만 일정하게 남아 있으며, 하나의 봉토에 1개씩의 돌덧널[石槨]이 축조되어 있다. 봉토의 크기는 1호분이 가장 큰 편으로서 15×10.6m 크기의 타원형에 가까운 평면을 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직경 10m 내외에 원형의 평면을 하고 있다. 주로 점질토를 약간 다져 쌓았으며, 1호분의 경우 경사면 아래쪽의 잔존 높이가 3.75m에, 위쪽은 0.25m 정도 된다.

매장주체부는 무덤구덩이를 0.6∼1.0m 깊이로 굴광하고 깬돌[割石]을 이용하여 일정 높이까지 수직으로 쌓은 다음 안으로 좁혀 가면서 쌓아 천장부에 약간 큰돌을 놓아 마무리하였다. 특히 각 벽의 모서리가 서로 이어지면서 둥글게 되어 있고 괴석형의 깬돌을 사용한 것은 논산 표정리 등의 돌덧널무덤과는 다른 점으로서 이른바 ‘백곡리형석곽’으로 분류된다. 5호분은 2단으로 굴광한 점이 특징이며, 모두 벽의 상부 또는 천장이 봉토 중에 위치하고 있는 반지하식 구조를 하고 있다. 2호는 완전히 파괴되어 구조가 확실치 않으나, 1·5호는 구덩식 돌덧널무덤이며 8호는 동남 단벽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여 앞트기식돌넛널무덤[橫口式石槨墓]으로 보여진다. 장축방향은 등고선과 거의 직교하는 서북-동남 방향을 하고 있다. 매장주체부의 크기는 길이, 너비, 깊이가 1호분이 3.75×1.3×1.6m, 5호분이 3.6×1.42×0.6m(잔존높이), 8호분이 2.6×1.0×1.26m인데, 이 중 5호분은 동남쪽의 단벽(1.42m)보다 서북쪽 단벽(1.23m)이 짧은 사다리꼴 평면을 하고 있다. 바닥은 자갈과 점토를 다진 다음 그 위에 얇은 편평석을 놓아 널받침[棺臺]과 같은 시설을 만들었다. 내부에 널이나 덧널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으나, 5호분에서는 14∼17㎝ 길이의 긴 널못[棺釘]이 출토되어 나무덧널을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두향(頭向)을 직접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5호분의 나무자루큰칼[木柄大刀], 쇠투겁창[鐵矛]의 위치와 8호분 출토 옥의 위치로 보아 주로 머리를 경사면 위쪽인 서북향으로 놓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유적은 도굴 등으로 많이 파괴된 편이지만, 토기와 철제 무기·마구·농공구, 옥 등의 장신구류가 출토되어 이 고분 축조집단의 성격을 살피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 중 토기류는 목이 곧은 단지와 난형(卵形)의 독[甕], 승문(繩文)에 횡침선이 있는 깊은바리모양토기[深鉢形土器], 꼭지가 없는 뚜껑, 넓고 편평한 바닥의 입큰항아리[廣口壺] 등이 있는데, 서울 지역에서 출토되는 한성기 백제토기와 동일하여 백제토기문화의 영향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한편 1호분에서는 깊은바리모양토기 등과 함께 연미형에 관부(關部)가 없는 쇠투겁창과 유경식 화살촉, 소찰(小札)로 된 갑옷편, 목심철판장등자(木心鐵板張鐙子)편, 재갈편, 철제 띠고리, 손칼, 도끼, 낫 등의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또한 1971년도에 토기가 수습된 바 있는 5호분에서도 나무자루큰칼과 연미형철투겁창, 유경식화살촉, 목심철판장등자, 안교(鞍橋)에 사용된 것으로 생각되는 띠고리, 손칼, 도끼, 낫 등이 출토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 유적은 비록 전체가 조사되지는 않았지만, 유물로 보아 대략 4세기 중·후반∼5세기 초 무렵에 걸쳐 조영된 것으로 생각되며 봉토 규모와 껴묻거리 등에서 남양반도 지역의 중심 고분군 가운데 하나로 보아 무리가 없다. 그런데 이 고분군은 한성기 백제토기문화가 직접적으로 반영되고 있으면서, 실용적인 철제 무기와 마구를 위주로 부장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로 보아 백곡리 집단은 한성 백제의 중앙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으면서, 서해안의 해상 교통 요지를 장악하고 있던 지역 집단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마구류는 기승문화가 이 무렵 백제 지역에 확산된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화성백곡리고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화성군 마도면 백곡리 백제고분과 토기류」(김원룡, 『백제연구』2,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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