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7년(선조 10)작. 높이 4.25m. 이 비는 일제 때 일본인들에 의하여 파괴되어 파편만 남아 있는 정도였으나 1957년에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그대로 이용하여 중건하였다.
중건된 비는 쌍귀(雙龜)를 떠서 새겨진 듯하며, 본래 모양의 높이 · 너비 · 두께 등은 정확히 고찰할 수 없다. 비문은 김귀영(金貴榮)이 짓고 송인(宋寅)이 썼으며, 전액은 남응운(南應雲)이 하였고, 박광옥(朴光玉)이 세웠다. 1380년(우왕 6)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의 전승을 되새기기 위하여 세웠다.
비문에는 당시의 전라도관찰사 박계현(朴啓賢)이 옛날 태조가 승전한 황산이 시대가 흐르고 지명이 바뀌어 잊혀져가니 비석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청을 함에 따라 왕명으로 건립하였음을 비롯하여, 이성계가 10배의 적을 대파함으로써 만세에 평안함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성계의 업적을 기려 이 비를 세운다는 명문 등이 실려 있다.
글씨는 조맹부(趙孟頫)의 서풍에 기반한 것으로, 조형과 필력에 있어서는 크게 뛰어난 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