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치상지는 삼국시대 백제의 달솔로, 풍달군장을 역임한 관리이자 장군이다. 백제 멸망시 항복했으나 당나라 군의 약탈에 분개하여 족장 10여 명과 함께 임존성을 근거지로 부흥운동을 전개하여 한때 기세를 떨쳤다. 하지만 다시 항복한 다음 당나라 편에 서서 임존성 함락을 도운 후 당에 가서 무관이 되었다. 부흥운동 종식 후 웅진도독부의 군장이 되었다가 신라의 공격으로 도독부가 소멸하면서 다시 당으로 돌아갔다. 토번과 돌궐을 치는 데 공을 세워 귀족 작호까지 받았으나 측천무후 때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무고로 옥에 갇혔다가 자결했다.
서부(西部) 출신으로 2품관인 달솔(達率)에 올라 풍달군장(風達郡將)을 겸하였다. 7척이 넘는 키에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660년(의자왕 20)에 사비성(泗泌城)이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해 함락되어 백제가 망하자, 부중(部衆)과 더불어 항복하였다.
그러나 그 뒤, 소정방(蘇定方)이 의자왕(義慈王)과 태자 효(孝)를 비롯해 여러 왕자를 사로잡고 당나라 군사를 풀어서 제멋대로 약탈하자, 이에 분개하여 가까운 족장 10여 명과 반기를 들어 임존성(任存城)을 근거지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부흥군은 곧 3만명으로 늘어나 한때 소정방의 군사를 물리치고 200여 성(城)을 되찾아 기세를 떨쳤다.
소정방이 당나라로 돌아간 뒤, 나당연합군은 백제유민들이 전개한 부흥운동을 막기 어려워 새로이 원병을 청해 수륙의 두 길로 공격을 강화하였다. 백제 부흥운동의 유력한 한 축을 형성하다가 부흥운동의 본거지였던 주류성(周留城)이 함락된 663년 9월을 전후하여 더 버텨나가기가 어려워 수로(水路)로 공격해온 당나라의 장수 유인궤(劉仁軌)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그는 오히려 당군의 선봉에 서서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보루였던 임존성을 함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부흥운동이 종식된 뒤, 흑치상지는 부여융(扶餘隆)과 함께 당으로 들어가 장안(長安)의 만연현(萬年縣)에 편적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664년에 부여융이 웅진도독(熊津都督)에 임명되어 백제땅으로 귀환할 때 흑치상지(黑齒常之)도 다른 백제 인사들과 함께 백제땅으로 돌아와 절충도위 · 진웅진성대(折衝都尉 · 鎭熊津城大), 즉 부여융을 수반으로 하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의 군장이 되었다.
웅진도독부가 신라군의 공격으로 한반도에서 소멸되면서 흑치상지는 당시 당으로 들어갔다. 이후 여러 차례 승진을 거듭하여 좌령군원외장군 양주자사(左領軍員外將軍揚州刺史)가 되어 토번(吐蕃)과 돌궐(突厥)을 치는데 공을 세웠다. 그 관직과 신임이 중국사람보다 두터워 벼슬이 연연도대총관 연국공(燕然道大總管燕國公)에까지 이르렀다. ‘국공(國公)’이란 당나라에서 9등급으로 분류되어 있던 귀족의 직위 중 세 번째로 3,000호(戶)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어 있었다.
그 뒤, 측천무후(則天武后)의 통치 때 응양장군(鷹揚將軍) 조회절(趙懷節)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주흥(周興) 등의 무고(誣告)로 옥에 갇혔다가 689년 10월 자결하였다. 흑치상지의 억울한 죽음은 9년 후인 698년 장남인 흑치준(黑齒俊)의 노력으로 신원되었다.
측천무후는 제서(制書)를 내려 흑치상지를 좌옥검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에 추증하고 훈(勳)과 봉(封)을 회복시켜 주었다. 생전에 그가 받았던 훈은 확인되지 않지만, 봉은 연국공(燕國公)이었다.
가족상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중녀(中女)로 적혀 있는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 흑치씨는 중국의 불교미술사에 그 이름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흑치씨는 백제 또는 고구려계의 유장(遺將)으로 흑치상지의 경우와 같이 당나라에 들어가 군공을 세워 ‘천병중군부사 우오위장군 상주국 준화군 개국공(天兵中軍副使右吾衛將軍上柱國遵化郡開國公)’에까지 관위가 올라간 순(珣)의 부인이다.
흑치씨는 706년에 남편 및 그의 가족들과 힘을 합쳐 8세기 전반기의 중국불교조각을 대표하는 산서성(山西省) 천룡산(天龍山)의 당대 석굴(唐代石窟, 11∼15, 17∼21굴)에 삼세불상(三世佛像)과 제현성(諸賢聖)을 조각하였다.
이 불상조각은 707년에 완성되었다. 이 해 10월에 불상이 조각된 사연을 적은 공덕비(功德碑)가 세워져 불교미술 분야 뿐만 아니라, 당제국에 있어서 한반도 출신의 유민활동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