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정치학원은 1951년 10월에 서울정치학원을 모체로 황해도 서흥군 율리면 오동리에 세워진 남파 유격대 및 지하당 간부 양성훈련소였다. 학원 교육생들은 월북한 남한출신자들로 구성되었으며, 당경력과 지식수준에 따라 차별화된 교육을 받았다. 교육생의 규모는 최대 1,500명에 이르렀으며, 1952년 9월부터 남한 각지에 파견되기 시작했다. 금강정치학원은 월북한 남한출신자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북한내에서 남로당계 숙청시 금강정치학원을 사설 반역군사집단으로 의심해 교육생들을 중앙당학교에 강제 수용하기도 했다.
금강정치학원은 1951년 8월 31일 북한 노동당 중앙정치위원회의 이른바 ‘결정서 제94호’에 근거해 설립되었다. 학원은 노동당 중앙연락부의 책임하에 10월 초순황해도 서흥군 율리면 오동리에 세워졌다. 학원의 설립 목적은 남한 지역의 지하당 간부와 유격대의 지휘관 및 핵심대원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금강정치학원은 서울정치학원을 모체로 해서 만들어졌다. 서울정치학원은 1951년 1월 27일 이승엽이 이른바 ‘미해방지구’에 파견할 중견 당간부들을 육성한다는 목적으로 서울 경기상업학교 자리에 세운 당간부 훈련소였다. 서울정치학원은 1951년 3월 중순 북한군의 후퇴로 서울의 학원을 폐쇄하고 강원도 홍천으로 이동한 후 5월 초에 황해도 봉산군 덕재면 봉양리로 옮겼다. 이 때 서울정치학원은 이을수가 원장이었으며, 제1·2·3·4중대와 불꽃중대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 중 불꽃중대는 가장 높은 간부들로만 조직됐다.
서울정치학원은 ‘결정서 제94호’에 따라 명칭을 금강정치학원으로 바꾸고 조직을 보다 더 확대 강화하였다. 1951년 9월 중순부터 서울정치학원생들은 황해도 서흥군 오동리와 칠성리 구간의 둘레 약 10㎞의 골짜기에 교사를 만들기 시작해 10월 초순에 완료하였다. 금강정치학원은 공습을 피하기 위해 건물들을 반토굴식으로 만들었으며, 건물은 1개 동에 1개 반이 수용될 수 있도록 17개 동이 만들어졌다. 건물과 건물 사이는 서로 보이지 않도록 거리를 넓게 잡았는데, 이는 교육생들이 모두 남파될 사람들인만큼 상호간 신분 노출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금강정치학원의 교육생들은 서울정치학원생들을 비롯해 북한 각지에서 차출한 월북한 남한출신자들로 구성되었다. 훈련기간은 당경력과 지식수준을 고려하여 1개월, 3개월, 6개월 과정이 있었으며, 그 외에 소년반이 운영되었다. 1개월에 해당되는 반에는 금강, 한강과 같은 ‘강’ 이름이, 3개월 반에는 비로봉, 모란봉과 같은 ‘봉’ 이름이, 6개월 반에는 구월산, 지리산과 같은 ‘산’ 이름이 붙었으며, 소년반은 ‘령’을 붙여 ‘단발령’이라고 불렀다. 이후 ‘강’, ‘봉’, ‘산’이라는 이름은 1952년 1월 중순에 폐지되고 중대별로 개편하여 안동중대, 인천중대, 죽령중대 등 남한 지역의 지명을 사용했다. 1개 중대는 3∼4개 소대로 편성되었으며, 인원은 50∼60명 정도였다.
금강정치학원생들은 1952년 2월 하순 제1단계 학습과 훈련을 마친 후 재분류되어 약 500·600명이 제2단계 교육에 들어갔다. 이 때 중대편제가 다시 광주, 송정리, 영등포, 서울, 남해, 제주 등 남한의 지명을 딴 ‘반’으로 개편되었다. 제2단계 교육에서는 군사훈련보다는 지하당 건설 과목에 역점을 두었으며, 기술부를 설치하여 기술교육을 실시했다.
금강정치학원의 기구로는 원장 김응빈(전 서울시당위원장), 정치부원장 송을수(전 서울정치학원장), 후방부원장 이인동(전 중앙당재정경리부장), 군사부주임 임호, 초급당위원회 간부부, 병원, 기술부 등이 있었다. 교육생들이 가장 많을 때에는 약 1,500명에 이르렀다.
금강정치학원 교육생들은 1952년 6월에 제2단계 교육을 마치고 9월부터 남한 각지에 파견되기 시작했다. 북한내에서 남로당계의 숙청이 이루어지면서 금강정치학원은 반역을 위한 사설 군사집단으로 의심받아 교육생들이 중앙당학교에 강제로 수용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