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목읍지 ()

인문지리
문헌
전라도 나주목의 연혁 · 인문지리 · 행정 등을 수록하여 1816년에 편찬한 읍지.
이칭
이칭
나주목여지승람(羅州牧輿地勝覽)
정의
전라도 나주목의 연혁 · 인문지리 · 행정 등을 수록하여 1816년에 편찬한 읍지.
개설

『나주목읍지』는 총 44개 항목으로 구성된 전라도 나주목의 지리지로, 1816년(순조 16)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며, 정확한 편찬과 발간 경위는 알 수 없다.

서지적 사항

이 책은 1책(38장)으로 세로는 30.0㎝이고, 가로는 21.2㎝이며 필사본이다. 표제는 『나주목읍지(羅州牧邑誌)』이고, 내제(內題)는 「나주목여지승람(羅州牧輿地勝覽)」이다. 이 책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본(규 17422)이 있고, 영인본은 2003년에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간행한 『전라도읍지(全羅道邑誌)』5가 있다.

내용

환적(宦蹟) 조에 조진선(趙鎭宣)이 l816년(순조 16)에 마지막으로 부임한 기록을 근거로 보면, 『나주목읍지』는 1816년(순조 16) 경에 편찬되어 일제 강점기 때에 전사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물, 호구 등 구체적인 내용은 대부분 정조 초년까지의 사실이 기록되었고, 정조 때의 읍지 편찬 양식을 따르고 있다.

『나주목읍지』의 항목은 건치연혁을 비롯해서 군명(郡名), 관직, 성씨, 산천, 풍속, 방리(坊里), 호구, 전결, 전부(田賦), 군액(軍額), 성지(城池), 창고, 조적(糶糴), 책판(冊板), 선창(船滄), 진관(鎭管), 진보(鎭堡), 목장, 봉수(烽燧), 학교, 단묘(壇廟), 총묘(塚墓), 불우(佛宇), 궁실, 누정, 도로, 교량, 도서(島嶼), 제언(堤堰), 장시, 역원, 형승(形勝), 고적, 토산, 진공(進貢), 균세(均稅), 과거, 인물, 명환(名宦), 제영(題詠), 비판(碑板), 입암산성각읍첩파수(笠巖山城各邑堞把數), 환적(宦蹟)의 순으로 모두 44개이다.

읍지의 내용 가운데에 특히 경제·군사적인 면이 매우 상세한데, 이것은 정조 시기의 읍지와 동일한 특징이다. 즉 전결, 전부, 군액, 창고, 조적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전부는 전세미태(田稅米太)·대동미(大同米)의 수량 등이 해에 따라 부동임을 밝히고 선혜청납·균역청납면세조·호조납면세궁결미·대동저미시재미·각아문보미·수어청납·상의원납·훈련도감납 등으로 세분하여 표시되었다. 군액도 본주속·경안속·향안속으로 나누어 기록하였고‚ 창고조에는 사창·동창·서창·남창·북창·삼향창·제민창·일선창·산성창·군기고·수군기고·삼선군기·봉대군기고 등에 소장된 물품과 수량이 기재되었다.

성씨조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나주목 부분과 동일하다. 진보조에는 우영진·지도진·흑산진 등의 위치와 군액·환향곡 등이 수록되어 나주가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점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단묘조에는 단 4곳과 묘 1곳‚ 김천일을 제향한 정렬사 등 사 5곳‚ 광해조에 사액된 경현서원 등 서원 10곳이 기재되었는데 서원이 학교조에 수록되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불우조에는 쌍계사에 관해 854년(신라, 문성왕 16) 임제종(臨濟宗) 백운대사가 창건한 이후의 개수·중수 및 여러 고사가 상세하게 적혀 있다. 불우, 궁실, 누정, 제영조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내용을 포함하면서 그 외에도 많은 시문들이 첨가되어 좋은 자료를 제공한다.

제언조에는 113개의 제언이‚ 장시조에는 13곳의 장시가 기재되고‚ 균세조에도 어장·어전·어망·염분·선의 위치와 수세량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당시의 농업 및 상업 발달의 정도를 짐작게 해준다. 도서조에는 나주에 소속된 압해도·지도·우도·암태도·팔금도·하의도·도초도·우이도·흑산도·홍의도 등 도서의 위치와 섬의 둘레를 기록하였다. 인물조에는 고려조의 정가신·나유·진자화·정지 등과 조선조의 박귀·최부 그리고 유우로서 정도전에 관한 기사 및 신색·신숙주·오자치·나세찬·금천일·양산숙 등이 실려 있으며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비판조에는 장유가 찬한 금천일에 대한 ‘창의사김공비‘와 이민구가 찬한 ‘덕룡산쌍계사비문‘ 등이 수록되었다. 환적조에는 1358년(공민왕 18)부터 1816년(순조 16)까지 역대 수령의 도임·체귀 일자가 기록되었으며 수령의 관직을 통해 읍의 승강에 변동이 잦았음을 살필 수 있다.

이외에 나주의 읍지로 『호남읍지』(규 12175)의 제1책에 「나주목여지승람」이 수록되어 있는데 1871년(고종 8)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895년(고종 32) 경에 편찬된『(호남)읍지』(규 12181)의 제8책과 제12책에 각각 『나주목읍지부사례(羅州牧邑誌附事例)』,『나주목장읍지사례성책(羅州牧場邑誌事例成冊)』이 수록되었고, 1899년(광무 3)에 편찬된 『나주군읍지(羅州郡邑誌)』(규 10781)가 있다.

의의와 평가

18세기 말 정조대 전라도의 중심 고을인 나주목의 연혁과 규모, 경제, 행정, 인물, 교육, 문화, 교통, 통신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전결, 전부, 군액, 조적, 진공, 균세 등의 통계는 다른 읍지의 해당 항목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내용이며, 창고조에는 수많은 창고가 등장하고 보관된 물품과 수량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다. 이처럼 나주목읍지는 경제 부분의 내용이 다른 읍지에 비해 풍부하여 나주지역을 비롯하여 조선의 산업 발달사 및 경제 제도사 연구 등에 도움을 준다.

참고문헌

『나주목읍지(羅州牧邑誌)』
『호남읍지(湖南邑誌)』
『나주군읍지(羅州郡邑誌)』
『규장각자료총서 지리지편 전라도읍지』5(서울대학교 규장각 편, 2003)
『한국지리지총서 읍지』4 전라도편 ①(한국학문헌연구소 편, 아세아문화사, 1983)
『한국지리지총서 읍지』5 전라도편 ②(한국학문헌연구소 편, 아세아문화사, 1983)
「조선후기 읍사례의 계통과 활용」(김태웅, 『고문서연구』15, 1999)
「16~17세기 읍지의 편찬배경과 그 성격」(양보경, 『지리학』27, 1983)
「조선왕조의 읍지연구」(김전배, 『한국비블리아』2, 1974)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e-kyujanggak.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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