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양(大陽) 박성중(朴聖中: ?∼1740)이 자신의 스승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의 언행을 기술한 것으로, 수록 시기는 1736년(영조 12) 1월 12일부터 1740년(영조 16) 4월까지이다. 표제는 도암어록(陶菴語錄)이고, 권수제는 도암선생문인박대양소기어록(陶菴先生門人朴大陽所記語錄)이며, 발문에서는 용문일기(龍門日記)라고 하였다. 대양(大陽)은 박성중의 자(字)이고, 용문(龍門)은 이재가 강학하던 용인(龍仁) 한천서원(寒泉書院)이다.
박성중과 동문수학하던 어떤 동학(同學)이 박성중 사후에 ‘용문일기’를 수습하였는데, 1740년 이후의 기록은 이미 유실된 상태였다. 이에 용문일록을 접하는 감회를 「용문일록감음(龍門日錄感吟)」이라는 3편의 칠언율시에 담은 뒤, 1761년(영조 37)에 지은 발문과 함께 권말에 수록하였다.
필사본으로서 1책(2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박성중은 스승의 평소 몸가짐과 일상생활, 독서법 등을 자세히 관찰하여 기술하였고, 강학의 방법과 그 내용, 각종 예법(禮法), 성리개념 및 경전(經傳)자구의 함의, 한자의 어원 분석, 시편(詩篇)의 수창, 제석(除夕: 1년의 마지막 날인 섣달 그믐날 밤)과 정월 보름의 풍속 등에 대해서도 적고 있다. 이재는 항상 “전일한 마음으로 위기지학에 힘쓰되,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赤心爲己, 斃而後已]”는 글귀를 문생들에게 강조하며 독실하게 학문에 힘쓸 것을 권면하였다. 강학한 과목은 『소학(小學)』·『사서(四書)』·『시경(詩經)』 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재는 과업(科業)과 실학(實學)은 겸치(兼治)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였고, 재능을 갖춘 선비가 과거준비에만 골몰하는 세태를 애석하게 여겼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이 책의 도처에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성중은 과거가 시행될 때마다 상경하여 시험에 응시하였고 그때마다 연거푸 낙방하였다. 1736년(영조 12) 2월, 촌철살인(寸鐵殺人)과도 같은 스승의 호된 가르침을 받았으나 끝내 과거를 포기하지 못하였다.
이재의 문하에는 한양(漢陽)·과천(果川)·회덕(懷德)·고부(古阜)·장단(長湍)·해주(海州)·연안(延安)·남평(南平)·대구(大邱)·원주(原州) 등 30여 곳에서 50여 명의 문생들이 찾아와 수학하였는데, 『도암어록』에는 서원에 머무는 이들 문도들의 출신과 성명을 일일이 적고 있어 이재 문도들의 성격과 규모를 파악하는데 일정한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