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27세 때인 1517년(중종 12)에 경주 지방의 학자인 외숙 망재(忘齋) 손숙돈(孫叔暾)과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서신으로 왕복했던 「무극태극논변(無極太極論辨)」을 얻어 보고, 정통 유가의 관점에서 비판한 저술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28세 때에는 조한보를 상대로 ‘무극태극논변’을 전개하였다.
1631년(인조 9)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 간행한 『회재집(晦齋集)』 권5에 잡저(雜著)의 일부로 실려 있고, 또 별책으로 필사하거나 간행한 것도 있다.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이 엮고 서예가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 15421621)이 글씨를 쓴 것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성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 할 수 있는 ‘무극’과 ‘태극’에 관한 정의를 놓고, 손숙돈과 조한보는 노(老)·불(佛)의 관점에서 해석하였고, 이언적은 유가, 특히 정통 성리학의 본령에 충실하게 해석하였다.
손숙돈·조한보에 관한 전기가 자세하지 않고, 그들의 저술 역시 전해오지 않으므로 두 사람의 무극·태극에 관한 견해의 전모를 알 수 없다. 다만 이언적의 글로 미루어 보면, 손숙돈은 육상산(陸象山)의 학설에 심취하였음이 분명하고, 조한보는 선학(禪學)의 기미(氣味)가 다분할 뿐만 아니라 ‘망기(忘機)’라는 호가 암시하듯이 도가사상을 혼입한 듯하다.
이언적은 손숙돈의 학설에 대하여 “망재의 무극태극변은 그 설이 대개 육상산으로부터 나왔고, 상산의 설은 주자가 이미 자세히 논변하였으므로 내가 덧붙여 말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면서 조한보의 학설을 집중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순수하게 주자학의 관점에서, 노·불의 이학(異學)을 혼입한 조한보의 설에 대하여 준엄하게 논박하였다.
이 글에서 이언적은 “손망재에게 보낸 조망기당의 답설을 언뜻 보면 그 견해가 너무 고원(高遠)하여 유가에서 많이 일탈하였고, 또 선학의 영향을 받아 유(儒)와 석(釋)을 온통 뒤섞어 놓았다. 후학을 위해서라도 변척(辨斥)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조한보의 ‘무극태극설’에 대한 비판 요지는 「서망재망기당무극태극설후」에 집약되었고, 비판의 표적은 ‘무극적멸(無極寂滅)’과 ‘존심상달(存心上達)’에 맞추어졌다. 비판 내용은 4차에 걸친 「답망기당서(答忘機堂書)」에서 구체적으로 부연 설명되었다.
이언적은 조한보가 노·불의 허무적멸(虛無寂滅)의 설에 젖어 있고, 특히 선가의 돈오적(頓悟的) 수양공부에 심취되어 있음을 집중적으로 비판하였다. 이에 조한보가 이언적의 비판에 대해 반박하는 서신을 보내옴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 철학적 논쟁이 개시되었다.
한국 성리학사상 ‘태극’의 개념을 정통 주자학의 관점에서 논변한 최초의 글로 이후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사이의 ‘퇴고논변(退高論辯)’,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 사이의 ‘우율논변(牛栗論辯)’의 시단(始端)을 열어, 조선성리학이 철학 중심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