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곡수매사업 ()

정치·법제
제도
소비조합이 농촌의 여유 양곡을 구매하는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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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소비조합이 농촌의 여유 양곡을 구매하는 사업.
개설

1946년 2월에 출범한 사실상의 북한 정권조직인 ‘북조선임시위원회’는 도시 식량의 부족량을 충당하기 위해 소비조합에 위임하여 양곡수매사업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초기인 1946년 3월부터는 행정기관의 사무원 및 노동자들에게만 적용하도록 했지만, 8월 20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결정서 제63호인 「북조선소비조합의 양곡수매에 관한 결정서」로서 각 도의 양곡수매 배정량을 결정하여 시행하였다. 이 사업은 1957년 11월 1일 내각 결정 96호 및 102호 「양곡수매 및 판매 사업을 국가통일체제에 의하여 진행」에 의하여 협동농장원을 제외한 북한 전 주민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내용과 변천

전후 복구건설과 관련해 1953년 8월의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중공업 우선과 경공업과 농업의 동시 발전’ 노선을 결정했다. 전후 경제복구 발전계획의 집행과정에서의 문제는 농업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농업부문에서의 위기는 현물세 징수와 양곡구매사업 수행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1954년은 해방 이래 북한에서 최대의 흉작을 기록한 해였는데, 이로 인해 1954년과 1955년에 양곡구매 및 현물세 징수사업을 완수하는데 중대한 지장이 초래되었다. 이 사업은 특히 전후 경제복구 및 3개년 발전계획을 집행하는데 있어서 생산건설 담당자들인 노동자와 도시 근로자들에 대한 급양을 목적으로 국가에 의해 수행되었다. 따라서 이 사업의 실패가 경제복구 및 발전계획 수행에 있어서 결코 가볍지 않은 차질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될 수 있었다.

추수 결과 예상에 훨씬 못 미치는 수확량에도 불구하고 농업현물세가 추수 이전에 예상된 수확량에 따라 책정된 징수비율이 그대로 적용됨으로 인해 법적으로 25∼27%인 현물세가 실제적으로는 30∼32%를 상회하였으며, 따라서 농민들이 과중한 현물세 징수에 소극적으로 참여하거나 거부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사회주의 공업화 과정에서 곡물 생산량의 증대 문제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는 곡물의 국가 장악 문제였다. 생산량이 정체되어 있는 상황에서 도시에서는 공업이 발전하면서 식량 수요가 더욱 증가하였다. 따라서 북한 당국은 농민으로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양곡수매를 강화하여야 하였다.

북한 당국은 1954년 10월 15일 개인 양곡상의 상행위를 금지한 상태에서 11월부터 양곡수매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1954년 11월 조선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양곡수매사업의 강화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국가 수매는 농민들의 거센 불만을 야기하였다. 국가 수매를 피하여 일부 농민들은 일시적으로만 농업협동조합에 가입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이로 인해 특용작물을 생산하는 농민들이나 도시 근로자들은 급식을 위해 양곡을 구입하는 일조차 어려워졌고, 이 때문에 도시 근로자와 농민 등 인민들의 불만이 높아졌으며, 농촌에서는 식량을 구하기 어려워 기아현상이 나타났다. 결국 당국은 국가의 양곡수매정책을 후퇴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런 조치들에 대해서는 후에 김일성이 그 오류와 편향을 지적했다. 김일성은 당시 “농촌지역에서 부농과 불순분자들이 양곡수매사업에 대한 농민들의 대대적인 저항을 조직하고 있었으며, 농민 수중에 양곡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만약에 애초 계획 목표량을 위해 양곡수매사업을 강행했더라면 당과 정부는 완전한 ‘정치적 패배’의 길로 들어섰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렇게 문제들이 노정되자 소련은 1955년 5월김일성을 모스크바로 초청해 새로운 정책을 권고했다. 그 주된 내용은 “양곡판매금지 조치를 철회할 것과 국유화를 강행하던 상공업 분야의 정책을 수정하여 사기업을 폭넓게 허용할 것, 농업 부문의 위기를 초래한 기존의 농업현물세 징수방식을 폐기하고 새로운 농업세 체계를 마련할 것, 기존의 5개년계획안을 변경할 것” 등이었다.

의의와 평가

특히 1954년도의 양곡수매사업은 농민들에게 힘겨웠다. 농가별로 여유 양곡을 조사한 후 거의 대부분을 수매하는 방식이었다. 협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농민에게는 대여 양곡도 나오지 않았다. 엄격한 양곡수매사업은 농민들이 협동조합에 가입하게 하는 촉진 역할을 하였다.

당사업의 오류와 결함문제에 이르러 양곡구매사업 수행에 있어서의 당의 오류를 강조하면서 김일성은 특정 인물들을 지적하고 북한의 사회경제 실상과 사업수행 상황을 은폐하려 했다고 비판하였다. 박창옥(朴昌玉)과 김일(金一)은 1954년 곡물수확에 대한 허위통계 보고 은폐와 관련하여 심한 문책을 당했다. 특히 박창옥은 비현실적인 경제복구 및 건설계획을 작성한 데 대한 책임을 추궁 당하였다.

4월 전원회의에서 당사업의 결함에 대한 문책 이상의 구체적인 당적처벌은 결정되지는 않았으며, 참석한 당중앙위 위원들도 토론에서 개별 당 및 국가기관들의 사업에 대하여 격렬히 비판한 데 반해 정부 및 당 지도부 자체에 대한 비판은 거의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계는 전원회의에서의 정책실패 문책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는 않았다.

1955년 동안 소련계 그룹은 내각과 당중앙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책수행상의 심각한 결함들이 김일성 앞에서의 아첨에 의해 은폐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정부와 당이 자주 국내 실정상황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받지 못함으로 인해 종종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김일성이 국내문제에 대해 보고받고 있는 정보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며, 이에 따라 1954년 수확평가나 양곡수매사업 등의 수행에서 심각한 오류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경제정책 실패로 인한 지도부 내 균열은 책임소재를 둘러싼 당내공방으로 발전하고 있었으며, 점점 김일성 주변세력과 더 나아가 김일성 자신에게로 책임논란이 접근해오고 있었다.

문제는 권력구조의 문제로 비화되었다. 당내 갈등의 분출은 소련의 충고와 경제위기 해결이라는 요인들에 의해 제어되고 있었으나, 오히려 이 두 변수는 김일성에게 자신의 권위에 대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책임론’이 당내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1955년 당 지도부 내의 갈등뿐 아니라 전사회적 차원에서 사상투쟁이 진행되었다. 4월전원회의 결정에 따라 국가 및 경제기관들과 그 일꾼들과 전체 당원들, 그리고 관련된 기업가와 상인들까지 사안의 경중에 관계없이 ‘자백운동’에 망라되었다.

참고문헌

『남북한(南北韓) 경제구조(經濟構造)의 기원(基源)과 전개(展開)(북한 농업체제의 형성을 중심으로)』(김성보, 역사비평사, 2001)
「1950년대(年代) 북한(北韓)의 권력갈등(權力葛藤)의 배경(背景)과 소련(蘇聯)」(백준기, 『1950년대 남북한의 선택과 굴절』, 1998)
집필자
류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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