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1년(영조 47) 12월 영조가 전주(全州)에 세울 조경묘(肇慶廟) 건립의 역사적 의의를 성찰하면서 왕실의 덕을 세우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아울러 후대 왕을 권면하기 위해 지은 글이다.
영조가 찬한 것을 입직승지가 발견하여 원임대신, 대제학, 제학 등에게 보인 후에 영의정 김상복(金相福) 등이 교정하였으며, 운각(芸閣; 校書館)에서 정서한 후에 간행하였다.
간행본의 건수는 명확하지 않으나 본문 말미의 기록에 따르면, 내입 5건과 세손궁 1건 외에 중앙의 6조를 비롯한 주요 관아 및 중신, 8도의 도신(道臣)과 양도(兩都) 유수 등에게 옥새를 찍어 각 1건씩 하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목판은 사국(史局)에 보관되었다.
목판본. 1책(14장). 책의 크기는 32.4×21㎝이고, 광곽(匡郭)은 사주쌍변(四周雙邊)이며, 반엽광곽(半葉匡郭)의 크기는 22.4×16㎝이다. 계선이 있으며 1면의 행자수는 6행 12자이다. 판심(版心)은 상화문어미(上花紋魚尾)이다.
표지 다음 면에 ‘운관간인 사고장판(芸館刊印 史庫藏板)’의 기록이 있어 이 책이 운관(교서관)에서 간행되었고, 그 목판은 사고(史庫)에 보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에 앞서 영조의 친필 ‘덕류석대 경수천억(德流石代 慶垂千億)’이라는 대자(大字)의 유묵이 있다. 또 본문 말미에 간행의 경위와 반사, 장판의 보관에 관한 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본문 다음에는 ‘봉교교정(奉敎校正)’이라는 제하에 교정에 참여한 인원 김상복, 김치인(金致仁)‚ 김양택(金陽澤)‚ 한익(韓翼)‚ 김상철(金尙喆)‚ 이창의(李昌誼)‚ 채제공(蔡濟恭)‚ 서명응(徐命膺)‚ 조엄(趙曮)‚ 심이지(沈頤之)‚ 이흥종(李興宗)‚ 이곤(李坤)‚ 조재준(趙載俊) 등 13인의 관함(官啣)과 이름이 열서되어 있다. 규장각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동일 판본이 소장되어 있다.
본문은 ‘어제수덕전편’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본문의 내용에 따르면 영조가 이 글을 짓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1771년 전주에 조경묘 건립의 역사적 의의를 성찰한 데에 있다. 즉 주나라의 후직(后稷)이 처음 덕을 세워 천 년이 지나 주문왕(周文王)이 왕위에 오른 것과 같이 왕조의 창업에는 그에 앞서 덕을 세운 선조가 있었으며, 조경묘 또한 주나라의 후직을 향사하는 예에 따라 건립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글은 영조가 김육(金堉, 1580~1658)이 지은 『종덕신편(種德新編)』 의 종덕(種德)의 의미에 깊이 감동하여 지었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후직과 문왕의 관계처럼 당시의 조선왕조가 태조를 비롯한 여러 선왕의 덕에 의해 이룩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영조는 이 글을 통해 자신의 소회를 다소 강개한 어조로 기술하고, 아울러 오늘의 군신은 과연 동심동덕(同心同德)하고 있는가를 반문하면서 신하는 물론 세손 정조에게도 덕행에 힘쓸 것을 당부하고 있다.
『어제수덕전편』은 상훈(常訓), 대훈(大訓), 훈유(訓諭), 자성편(自省編), 정훈(政訓) 등 영조가 지은 다른 많은 어제류들과 함께 영조의 통치사상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는 사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