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동형 주거지 ( )

선사문화
개념
방형의 수혈주거지 둘레에 원형 또는 타원형의 도랑을 돌린 형식의 주거지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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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방형의 수혈주거지 둘레에 원형 또는 타원형의 도랑을 돌린 형식의 주거지 유적.
개설

1999년 12월 4일부터 2000년 1월 21일까지 울산대학교 박물관이 울산광역시 동구 화정동 252-2번지 무룡고등학교 신축부지에서 발굴한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주구(周溝)을 발굴하였다. 이 가운데 6기의 주거지는 모두 주변에 타원형 또는 원형의 주구(周溝)으로 구획되어 있었으며, 원형 또는 방형의 주구만 발견된 것이 5기, 방형 주구 내부에 기둥구멍만이 확인된 것도 1기가 있다. 내부에서 수혈주거지가 검출된 것을 연암동형주거지로 분류하고 있지만, 주거지가 삭평되고 주구(周溝)만 남았을 경우가 있기 때문에, 연암동형주거지를 주구 내부의 주거지 존재에만 한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는 연암동유적에서 연암동형주거지와 함께 확인되었듯이 주구만 있는 경우나 주구 내부에서 주혈군(柱穴群)만 확인 되는 경우도 넓은 의미에서는 연암동형주거지의 개념으로 포함시켜도 될 것이다.

연원 및 변천

연암동형주거지는 대체로 청동기시대 후기로 편년된다. 가장 이른 유적으로 경주의 하서리 유적에서 2기의 주거지가 발굴되었는데, 주구(周溝) 내부에서 기둥구멍만이 확인되었고, 청동기시대 전기 말경에 해당하는 유물들이 주구 내부에서 출토되었다. 이는 주구 안쪽에 지상 건물지가 건축되었거나 제사와 관련된 유구가 조성되었던 듯하다. 또 하서리 유적의 주구는 평면형태가 방형이며, 한쪽 모서리 부분에서 주구가 단절되어 있는데, 이 부분을 내부로 출입하는 입구로 사용되었다고 추정된다. 어느 한 모서리 또는 한 변이 열려있는 주구는 청동기시대 후기의 유적에서도 확인되지만, 방형의 주구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청동기시대의 석관묘 외곽에 주구를 둘러쌓는 주구식 구획묘(周溝式 區劃墓)가 전기 후반의 늦은 시기나 말경에 나타난다. 전기의 것은 현재로서는 강원도 춘천 천전리유적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지만, 울산에서도 천곡동 가재골유적에서 유사한 구조가 발굴되었고, 늦은 후기의 것으로는 진주 대평리유적에서는 대평리형 석관묘가 조사된 바가 있다. 울산지역의 청동기문화는 강원도를 경유한 한반도 동북지방의 두만강문화가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전파한 것도 존재하므로, 무덤을 주구로써 구획하는 것은 서로 연관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죽은 사람을 묻은 묘의 일정 부분을 구획하여 묘역으로 삼은 것은 사자(死者)가 살았을 때에도 자신의 주거영역을 주구로써 구획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연암동형주거지는 단순히 저지대의 마을에서 보이는 습기제거용의 구조적인 측면도 예상되지만, 개별 주거 영역의 구획이라는 성격도 포함할 수 있다. 연암동형주거지는 청동기시대 전기 말경에 의례 같은 특수한 기능을 가진 장소의 구획을 방형으로 설치하다가 후기가 되면서 주구는 개별 주거지의 구획으로까지 확산되면서, 개별주거의 규모와 크기에 따라 방형 또는 타원형ㆍ원형으로 다양하게 변화된 것으로 생각한다.

내용

연암동형주거지는 울산 연암동유적에서 최초로 발견된 주거지 형식으로, 울산을 중심으로 경주지방에도 유사한 형식의 집자리가 분포한다. 주거지의 크기는 1호는 650×370×17㎝, 7호는 687×410×47㎝, 8호는 570×420×50㎝이다. 유물은 짧은빗금무늬토기〔短斜線文土器〕와 구멍무늬〔孔列文〕가 함께 새겨지거나 각각 따로 새겨진 토기와 횡선문토기〔橫線文土器〕가 출토되었으며, 홈자루간돌검〔二段柄式磨製石劍〕,이단슴베있는 간돌화살촉〔二段有莖式石促鏃〕, 조갯날도끼〔蛤刃石斧〕, 바퀴날도끼〔環狀石斧〕, 그물추〔漁網錘〕 등의 석기가 출토되었다. 연암동유적의 주거지에는 대체로 4∼8개의 기둥과 수혈식 노지가 조성되었고, 수혈주거지의 모서리에 달린 배수구가 외곽의 도랑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주거지의 바닥면보다 외곽의 도랑이 더 깊은 것이 특징이며, 도랑의 폭은 1m전후이고, 원형의 외곽 도랑 직경은 8∼14m에 이른다. 연암동유적에서는 이러한 수혈주거지 이외에도 내부에서 아무런 시설물이 없이 방형에 가까운 원형도랑만 있거나, 방형의 도랑 내부에 기둥구멍이 불규칙하게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외곽의 도랑은 배수구의 역할 또는 주거지 내의 습기를 제거하는 기능으로 추정된다. 내부에 수혈주거지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는 상부가 삭평되어 수혈주거의 흔적이 깎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기둥구멍만 노출 되는 경우는 역시 수혈주거지의 흔적이거나, 평탄지를 조성하고 지상식 건물을 건축한 형태로 존재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외에도 연암동형 주거지는 주거시설 이외에도 창고시설 혹은 의례가 거행되던 구역으로도 추정되고 있다.

현재까지 조사된 연암동형주거지는 모두 하천에 가까운 저지대에 분포하며, 내부에 주거지가 조영되어 있지 않는 경우는 구릉에서도 발견된다. 특히 울산지역의 청동기시대 후기 주거지들이 다른 지역과는 달리 대부분 수혈주거지의 모서리에서 길게 뻗은 배수구가 설치된 것이 특징인데, 주거지 내부의 습기 제거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저지대 취락의 주거 외곽에 돌려진 주구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역시 제습용의 시설물로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라고 판단된다.

그런데, 구릉지의 예에서는 경주를 포함하여 다수의 유적에서 내부에 주거지가 조사된 예는 없다. 구릉지는 침식이 활발하여 주거지가 삭평될 여지는 있지만, 인접하여 조성된 수혈주거지는 남아 있는 것에 반하여 주구 내부만 삭평되었다고도 보기 힘든 정황은 있다. 따라서 구릉지의 연암동형주거지는 거의 지상식 건물에 가까운 시설물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내부에 잔존한 기둥구멍들을 통하여 지상식 건물지나 제의와 관련된 시설물이 설치되었고, 공간의 구획이 특별한 기능으로서의 의례공간임을 상정할 수도 있다. 반면에 수혈주거지의 경우는 주구와 주거지 사이에는 일정 높이의 흙을 쌓아, 수혈주거지 주변의 흙둑으로 삼고 홍수나 물피해로부터 가옥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물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의의와 평가

연암동형주거지는 울산지역의 청동기시대 후기의 문화적 성격을 확인할 수 있는 주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연암동형주거지가 출현하는 시기의 직전에는 의례공간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연암동형주구나 수장의 묘로서 주구식 구획묘가 출현하는 시기로 청동기시대 전기 말경에 해당하는데, 영남지역에서는 청동무기의 생산과 논농사의 시작 등과 함께 지역의 수장이 등장하는 현상을 주목할 수 있다. 이 시기부터 취락 내에서 일반 주거는 소형화ㆍ규격화하여 장방형 또는 방형을 띠면서 기둥의 배치가 획일화하는 변화가 나타난다. 이것은 가옥의 규모나 형태의 규제, 또는 통일성이라는 사회문화적 변화를 시사하는 것이다. 연암동형주거지나 연암동형주구는 이러한 수장을 중심으로 사회통합을 위한 의례행위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혈연적 가족체가 분화되면서 지역공동체가 확대ㆍ재편성되는 사회발전을 꾀하게 된 것이다. 개별 가옥을 각각의 주구로 구획함으로써 청동기시대 전기에 2∼3기의 가옥으로 군집을 이루었던 가족 중심적인 유대관계는 새로운 형태로 변모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울산지역에 마을을 둘러쌓는 환호시설이 축조되기 시작하는 것도 연암동형주거지의 출현과 상관이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울산식주거지의 복원」『한국청동기학보』2호(김현식, 한국청동기학회, 2008)
『울산 북구 연암동 유적』학술연구총서 제12집(이재현ㆍ김호진 외,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 2005)
『양남 하서리유적』연구총서 제23책(김길웅ㆍ김호상 외,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박물관, 2004)
『울산 연암동유적』학술연구총서 제9집(전호태ㆍ김영민 외, 울산대학교박물관, 2001)
『울산 산업로 배면도로 개설구간 내(율동∼화봉택지) Ⅲ구간 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자료집』(울산문화재연구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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