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김씨 김주신(金柱臣)에게 딸 둘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숙종의 제2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이고, 다른 사람은 윤면교(尹勉敎)의 아내이다. 윤면교의 아들은 윤동석(尹東晳)이고 손자가 윤광심이다. 따라서 윤동석에게 인원왕후는 이모이고, 윤광심에게는 이모할머니가 된다. 그러한 인연으로 윤광심은 인원왕후가 태어난 순화방(順化坊) 소재 양정재(養正齋)에서 살았고, 인원왕후의 동기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1769년 벼슬을 받았다.
『잉서』는 『대학』, 『논어』, 『맹자』 등 사서에 대한 주석과, 「경계보주(經界補註)」, 「재재전(梓材傳)」과 같이 『맹자』나 『서경』의 특정 부분에 대한 고증이 수록되어 있으나, 나머지는 대부분 예(禮)와 관련된 내용이 중심이다. 그의 부친 윤동석의 저술 가운데 『노운삼관통(老耘三官通)』이 있는데, 저자가 과거에 나가지 않고 학문적인 성과를 낸 것은 가학의 전통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사본. 21권 6책. 장서각에도 소장되어 있다.
권별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권1의 「대학장구자독(大學章句自讀)」에서, 윤광심은 1789년(정조 13)의 서문에서 주자(朱子)의 「대학장구서」를 거의 그대로 전재하면서 주자가 정자(程子)의 뜻에 따라 『대학장구』를 지었듯이 자신도 주자의 뜻에 따라 여러 책을 참고하여 「자독(自讀)」을 짓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본문의 구성도 대학 원문, 주희의 ‘장구’, 자신의 ‘자독’의 차례로 배열하여 자신의 뜻을 나타냈다. 한편 「대학장구서」의 연월일표시가 ‘순희기유이월갑자(淳熙己酉二月甲子)’로 되어 있는데, 윤광심도 이를 일치시킨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이를 기획한 것으로 추정된다.
권2의 「대학자독설략(大學自讀說略)」에서는 경전으로 구분한 것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말미의 통론에서는 장구를 경정(更定)한 것에 대해 옹호하였다.
권3의 「논어설략(論語說略)」과 권4의 「맹자설략(孟子說略)」은 각각 『논어』와 『맹자』에 대해 특정 구절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정리한 것이다.
권5의 「경계보주(經界補註)」는 『맹자』「縢文公」의 내용에서 정치의 핵심이 경제정책에 있다는 원칙 아래, 이에 관한 원문과 주희의 집주(集註)를 전재하고 이어서 자신의 설명을 ‘보주(補註)’로 정리한 것이다. 항산(恒産)과 항심(恒心)의 관계를 첫머리에 설명하고, 정전제(井田制)와 관련된 논의를 정리하였다.
권6의 「재재전(梓材傳)」는 『서경』「주서(周書)」에 대한 독자적인 주석으로 『서경대전』과 구두(句讀) 방식에 차이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권7의 「주례재독(周禮再讀)」은 「천관(天官)」, 「지관(地官)」, 「춘관(春官)」, 「하관(夏官)」, 「추관(秋官)」, 「고공기(考工記)」, 「총설(總說)」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말미에 수록된 지문(識文)에 따르면, 『주례』는 1792년(정조 16)에 읽었다가 1811(순조 11)에 다시 읽게 되었는데 새삼 읽기 어려움을 깨닫고, 총명하고 뜻맞는 선비와 고증하고 정돈하고 싶으나, 뜻을 같이할 사람이 없고 병들어 쇠약한 처지를 탄식하는 내용이다.
권8의 「경제고설(磬制考說)」은 악기 경(磬)의 치수를 고찰한 것으로, 평소 『악학궤범』과 『주례』에 소개된 경의 크기가 다른 것에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1792년(정조 16)에 세종대 계축에 만들어진 것을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상고하게 된 것이다.
권9의 「의례차설(儀禮箚說)」은 사관례(士冠禮), 사혼례(士昏禮), 사상견례(士相見禮), 향음주례(鄕飮酒禮), 향사례(鄕射禮), 빙례(聘禮), 공식대부례(公食大夫禮), 근례(覲禮), 상복(喪服), 사상례(士喪禮), 사우례(士虞禮), 특생궤식례(特牲饋食禮), 소뢰궤식례(少牢饋食禮) 등에 자신의 견해를 정리한 것이다. 맨 마지막장의 지문에 따르면, 1784년(정조 8) 여막(廬幕)에서 『의례』를 처음 읽고, 1790년(정조 14) 심제(心制) 때 다시 읽었다고 언급하고, 1793년(정조 17) 가을 10년만에 아산정당(牙山政堂)에서 이 작업을 마무리하게 되었다고 기술하였다.
권10의 「최상정전(衰裳正詮)」은 1785년(정조 9) 6월에 쓴 서문에 따르면, 한나라 정현(鄭玄)의 오류를 송나라 사마광과 주희의 예서에서도 답습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상복(喪服)」 1편에 집중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옛 제도와 가깝게 되었다고 자평하면서 「최상정전」으로 이름하였다.
권11의 「최상변설(衰裳辨說)」은 「최상정전」의 논지를 보완한 것이다. 서문에 따르면, 「최상정전」을 지은 뒤에 여러 학자들의 분분한 학설이 오랫동안 사람들의 이목을 가로막아왔기 때문에, 논증의 핵심을 추려서 권말에 부록하여 자신의 견해가 전거를 토대로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제1절에서 제9절까지 부인최(婦人衰)까지 거론하고 마지막 총설(總說)을 두어 총평하였다.
권12의 「심의훈고(深衣訓古)-부재법(附裁法)」은 1784년(정조 8) 2월의 서문에 따르면, 심의에 대한 분분한 견해를 통일하여 옛 제도에 부합하게 하려는 취지에서 옥조, 심의, 등편의 내용을 검토하고, 경례(經禮)에 보이는 길흉조제(吉凶朝祭) 때의 복(服)을 참고하여 작성한 것이다. ①심의의 고증과 「전도(前圖)」·「후도(後圖)」·「교금결소대도(交襟結小帶圖)」의 그림, ②대(帶)의 고증과 「재료도(再繚圖)」·「약조도(約組圖)」·「합결도(合結圖)」의 그림, ③관(冠), ④폭건(幅巾)의 고증과 「종리봉침도(從裏縫針圖)」·「반표철대도(反表綴帶圖)」·「과전결후도(裹前結後圖)」의 그림, ⑤구(屨)의 고증과 「철기도(綴綦圖)」·「결기도(結綦圖)」의 그림 등을 수록하고, 재법에서는 심의, 대, 폭건, 구의 재단방법을 정리하였다.
권13의 「필제고설(韠制考說)」은 슬갑의 기원과 명칭, 치수를 고증한 것으로 「직도(直圖)」·「전후방도(前後方圖)」·「전방후좌각도(前方後挫角圖)」·「전후정도(前後正圖)」등의 그림도 그려서 자신의 주장을 갈무리했다.
권14의 「질대보전(絰帶補傳)」는 상복의 수질(首絰)과 요대(腰帶)의 명칭 및 변제(變除)와 겸복(兼服)의 절차에 대해 고경(古經)을 전술하여 보완한 것이다. 또한 다음의 내용이 부기되어 있다. ①「상소기상(喪小記上)」: 1784년(정조 8) 생모의 상을 당하여 부친의 명에 따라 실행하고, 따로 참고하여 8개 조항으로 정리한다고 하고, 부친의 저술로 『칠칙사례(七則四禮)』가 있다고 한다. ②「상소기중(喪小記中)」: 1788년(정조 12) 조모 조부인(曺夫人)의 상을 당하여 정리한 변례(變禮) 7개 조항이다. ③「상소기하(喪小記下)」: 1789년(정조 13)에 생부의 상을 당하여 7개 조항을 기록한 것이다. ④「부의(祔義)」: 합사의 의미에 대해 몇가지 조항으로 기술한 것이다.
권15의 「독좌이문(讀左異聞)」은 조카 순기(淳基)에 좌전을 가르치면서 선공(宣公)에 이르렀을 때 세무약설(稅畝略說)과 조철법(助徹法)에 대해 자신의 견해로 가르쳤고, 잊지 않기 위해 차기(箚記)한 것을 정리한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곡량전』과 『공양전』의 일부가 권말에 수록되어 있다.
권16의 「음부경전(陰符經詮)」은 도가 계열의 경전인 『음부경』의 상·중·하편에 따라 경문마다 자신의 견해를 정리한 것이다.
권17의 「의례태설(疑禮汰說)」은 상제례에 대해 문답한 편지를 정리한 것이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으로는 이여기(李汝紀), 이사원(李士遠), 이주경(李周卿), 자형홍치장씨(姊兄洪穉章氏), 진사 이조현(李朝鉉) 내종(內從) 심우태(沈祐泰), 복초(復初) 윤광안(尹光顔), 조익현(趙翼鉉), 김관지(金寬之), 조홍진(曺鴻振), 광경씨(光絅氏), 김유량(金幼亮), 족제(族弟) 광민(光閔), 김치숙(金穉叔), 김일여(金逸如), 족형(族兄) 광보씨(光普氏), 차소(次韶), 백재종씨(伯再從氏), 사노(士魯), 유한준(兪漢雋), 응지(凝之), 치옥(穉玉), 이악빈(李岳彬), 정영중(鄭英仲), 류시공(柳時恭), 한택유(韓宅裕) 등이 있다.
권18의 「고설(瞽說)」은 1792년(정조 16)에 쓴 서문에 따르면, 1783년(정조 7) 봄부터 눈이 침침하여 백내장을 앓게 된 뒤에 고서를 외우거나 오래도록 연구를 하다가 떠오른 것을 정리한 것이다.
권19와 권20의 「간취(簡聚)」는 윤광심의 편지를 모은 것이다. 대부분 상제례와 복제 등에 대해 답변한 것이다.
권21의 「차집(且集)」은 목록에는 있으나 실제는 없다.
윤광심은 학문적 전승관계가 분명하지 않고 과거에 급제한 바도 없으며, 인원왕후의 동기라는 인연으로 말단 관직에 잠시 있었던 존재로서 학계나 정계에서 주목받았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대의 국내외의 유명한 시인의 시를 선집한 『병세집』을 편집할 만큼 시적 안목이 뛰어났고, 「고설」에서 볼 수 있듯이 수많은 책을 탐독하고 깊이 사색한 것이 병이 될 만큼 학문적 열의가 대단했던 인물이다.
김주신의 외손이고, 파평 윤씨로서 윤증계열과 멀지 않은 소론적 분위기가 있었다. 18세기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에서 성장했으므로 소론계열의 경학적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는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