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흥남공장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이론을 가르쳤다. 평양적색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동맹파업을 주도하다가 수감되었으며, 광복 후에는 조선공산당함경남도 책임비서와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897년 함경남도 홍원군 주익면 남계리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은 정나기(鄭羅基)이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함흥 영생중학교와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24년 2월 신흥청년동맹에 가입하여, 8월에 이 동맹의 기관지『신흥청년』의 동인이 되었다. 1925년 11월에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서무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2월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고, 3월 권오설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경성부 제2구 제2야체이까 학생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6년 7월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조선공산당의 추천으로 러시아 모스크바에 가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였고, 1929년에 졸업하였다. 1930년 9월 귀국하여 12월에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흥남공장 노동자에게 사회주의 이론을 가르쳤다.
‘적색노동조합결성’을 지도하는 연구회를 조직하였으며, 1931년에 이 연구회를 평양적색노동조합 결성의 모체로 만들었다. 정달헌은 1931년 평양에서 동맹파업을 주도한 이유로 구속되어 1938년까지 복역하였다가 1940년 재차 검거되어 1945년 해방 후에 출옥했다. 1945년 9월 26일 서울에서 10개 산별노조 대표 51명이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30일 제1차 준비위원회를 열어 11월 10일까지 전평 결성 준비를 완료하기로 하였는데, 당시 정달헌은 북조선 지역 조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10월 10일 열린 ‘서북5도당책임자급당열성자대회’에서 정달헌은 함남출신 공산주의자로서 회의에 참석하였고, 대회 마지막 날인 13일에 진행된 ‘조선공산당북부조선분국 집행위원 및 검사위원 선거’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이 창당되면서 김일성은 오기섭의 제자였던 주영하를 당부위원장에 발탁하였는데, 주영하는 당부위원장이 된 이후 오기섭과 함께 정달헌을 반소분자로 내몰았다. 1948년 3월 27∼30일에 열린 북조선로동당 제2차 대회에서 정달헌은 한일무에 의해 과오를 지적당하고 자기비판을 요구받았으며, 결국 중앙위원에서 면직 당하였다. 그러나 정달헌은 이미 조선공산당함경남도 책임비서로부터 평안북도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좌천된 상태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정치적 진출이 봉쇄되었다.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