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문인과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해방 직후 북한에서 언론기관 설립과 초기 김일성의 항일운동을 우상화하는데 기여하였으며, 남한으로 망명하여 북한에 대한 정보와 반공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직후부터 김일성(金日成)을 뒤따라 다니며 그에 관한 보도를 거의 도맡았으며, 김일성의 직속기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11년 평안남도 성천(成川)에서 태어나 1929년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조도전(早稻田)대학 예과에 입학하였고, 1932년에는 일본 조도전대학을 퇴학당하고 투옥되었다.
1933년 시인 임화(林和)와 함께 『집단(集团)』을 발행했다가 폐간당하고, 『조선중앙일보』에 입사하여 1936년 『조선중앙일보』가 폐간당하기 까지 일본 동경 특파원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1942년에는 『평양매일신문사』에 입사하여 이 신문사가 폐간할 때까지 일했고, 1945년에는 평양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을 지냈고, 평양인민정치 위원회 위원을 지내면서 같은 해 평양민보사 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 뒤 1946년에는 평양시문학예술동맹위원장과 북조선문학 예술 동맹 서기장, 그리고 북한기관지 민주조선사 주필을 지냈다. 1948년에는 북한 『조선중앙통신』 보도부장을 지냈으며, 1951년에는 주필을 지냈으나, 1952년 주필에서 물러나 군소(群小) 잡지 기자로 전락했다.
1953년 대일본 친선공작 사명을 띠고 일본에 밀파되어 한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대일본 친선공작 활동을 전개하다가 지금껏 자기가 해온 것이 모두 부질없음을 깨닫고, 1959년 대한민국으로 귀순하였으며, 귀순 후 육군본부 특전감실 집필위원이 되었다.
1960년에는 동방통신사 『동방순보』 사장을 지냈고, 1961년에는 내외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연구소장을 지냈다. 1963년에는 『내외신문』 사장을 지내면서부터는 북한을 비판하는 많은 저서를 내놓았는데 특히 『북한편람』은 북한을 연구하는데 크게 기여한 책이다.
1962년 5월 3일부터 동아일보에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發)한다”라는 글을 쓴 일이 있다.
북한해방통일촉진회 부회장을 지내기도 했고, 「공산권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