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덕왕은 교서를 내려 사람의 상하와 지위의 존비(尊卑)에 따라 색복(色服)·거기(車騎)·기용(器用)·옥사(屋舍)에서 엄격한 구별을 두도록 하고 이를 어길 경우 형벌에 처하도록 명령했다.
흥덕왕 즉 김수종(金秀宗)은 애장왕(哀莊王)대부터 형인 상대등(上大等) 김언승(金彦昇)과 함께 왕의 숙부로서 권력을 행사했다. 또한 김언승이 애장왕을 살해하고 헌덕왕(憲德王)으로 즉위하는 데에도 적극 협조했다. 이를 통해 김언승·김수종 계열의 정권 안정을 도모했다. 헌덕왕을 이어 즉위한 흥덕왕은 행정기구의 개편과 귀족세력의 억제를 통해 왕권의 전제화(專制化)를 추구했다. 그러나 자신의 집권에 협조한 김우징(金祐徵) 등 일부 진골(眞骨) 세력에 대해서는 정치적 지위를 인정해야 했다. 흥덕왕교서는 바로 이들 진골귀족을 중심으로 한 계층구별을 엄격히 하는 동시에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발표되었다.
흥덕왕교서(興德王敎書)의 내용은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삼국사기(三國史記)』권33, 잡지(雜志)2에 실려 있다.
흥덕왕교서의 서두에서는 지위에 따라 의복이 달라야 하는데 풍속이 경박해지고 백성들이 사치에 빠져 신분에 따른 예의가 무시되는 문제점을 지적하였고, 옛 법에 따라 색복 등에 대한 교서를 반포하게 되었음을 밝혔다. 이 교서는 색복·거기·기용·옥사 분야의 총 58종에 걸쳐 신분별(身分別) 사용의 한계를 일일이 규정하였다. 진골 대등(大等)이 복두(幞頭)를 마음대로 쓰되 겉옷에 계수금라(罽繡錦羅)를 쓰지 못하게 하는 등 진골·6두품·5두품·4두품·평인에 대해 사용 가능한 품목과 불가능한 품목을 열거하였다. 6두품·5두품에게 동일하거나 4두품·평인에게 동일한 규제가 많은 반면, 진골과 6두품 간에는 동일한 규제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면, 수레의 휘장에서 진골은 소문릉(小文綾) 등을 사용할 수 있지만, 6두품은 진골 이상의 귀인을 수행할 때에는 휘장 자체를 설치하지 못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지방의 진촌주(眞村主)는 5두품과 같고 차촌주(次村主)는 4두품과 같음을 명시했다.
흥덕왕교서는 사치의 금지를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신분에 따른 품목의 제한을 강조했다. 특히 진골에 대한 제한과 함께 진골과 6두품 사이의 구분을 강조한 점으로 보아 이는 흥덕왕의 정권 안정에 기여한 진골 귀족의 요구에 부응하면서도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