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의령 출생. 본관은 담양(潭陽). 자는 덕명(德明). 집안에 전해오는 많은 전적을 공부하여 천문·지리·병서에 박학하였으며, 당대의 사표(師表)로서 원근 사림(士林)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무과에 급제하여 용양위(龍驤衛) 부사과(副司果)의 직첩을 받았으나 은거하여 나오지 않았다. 1894년(고종 31) 동학군이 봉기하자 그 명분이 온당치 않다 생각하여 스스로 ‘대장(大將)’이라 칭하고 동학군 진영에 깊숙이 돌진하니, 동학군이 두려워하여 물러가고 마을사람들이 안심하고 평정을 되찾았다.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빼앗은 일제는 우리나라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한국 농민의 토지를 약탈하기 위하여 전국에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당시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일대의 토지는 이곳 주민들이 개간하여 수년 전부터 지세를 납부하고 민유지로 경작해 온 토지인데도 불구하고, 일제는 이 일대의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시키고 임의로 조선농업주식회사에 대부하였다.
1914년 8월 26일에는 총독부의 임시 토지조사국원이 파견되어 일대의 토지에 대한 측량을 계획하였다. 이때 전중진은 정곡면에 대한 토지 측량을 하게 되면 모든 토지가 국유지로 편입됨과 동시에 조선농업주식회사(朝鮮農業株式會社)로 이관되어 자연히 국유화될 것을 예견하고, 주민들과 힘을 모아 이에 대비하였다.
마침내 토지조사국원이 국유와 민유의 경계선을 측량하려고 하자 전중진 등은 주민 700명을 모아 측량의 불법성을 주장하고 조사원이 세운 푯말을 뽑아버리거나 조사원을 난타하여 토지 측량을 못하도록 막았다. 다음날인 27일에도 토지조사원들이 경찰을 앞세우고 다시 나타나 토지 측량을 하려고 하였으나 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역시 실패하였다.
전중진은 이 일로 1914년 8월 29일 남병우(南炳祐)·이진우(李震雨) 등과 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며, 1915년 1월 28일 소요와 공무집행방해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