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태조산에 자리 잡은 성불사의 전각들이 위치한 뒤편 산자락에 있는 마애 석가삼존불과 16나한상, 그리고 희미하게 보이는 일군의 불입상들로서, 2002년 8월 10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마애상들의 조성 시기는 조각기법이나 신앙적 분위기, 사찰이 소재한 태조산 일대의 역사적 배경, 사찰 창건에 대한 후대의 기록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11세기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마애상들이 조성되어 있는 성불사는 고려 초 연기(烟起)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성불사에 대해서는 사찰 이름만 『동국여지승람』에 언급되었을 뿐이지만 태조산 주변의 다른 사찰과 함께 이미 고려시대에 세워져 조선 초기까지 맥이 이어져온 것으로 짐작된다.
이 일군의 마애상들은 세로 248㎝, 가로 357㎝ 크기의 바윗면에 새겨져 있는데, 법당 뒤쪽 네모꼴 바위의 전면에는 겨우 형체만 알아볼 수 있는 불입상이, 우측면에는 석가삼존과 16나한상이 각각 부조로 새겨져 있다. 석가삼존과 16나한상이 부조로 새겨진 바윗면에는 하단에 모든 존상을 받치고 있는 듯한 커다란 연화대좌가 선각되어 있고, 좌우에는 공양상이나 역사상으로 보이는 존상이 각각 1구씩 배치되어 있다. 큰 연화대좌 위의 작은 연화대좌에는 결가부좌의 자세로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결하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본존불이 새겨져 있으며, 그 좌우에는 협시 보살입상이 위치한다. 삼존상의 좌우와 상부에는 다양한 자세와 방향의 나한상들이 삼존상을 에워싸고 있는 듯하다.
본존상은 육계의 구분이 없는 큰 머리에 좁은 이마와 턱이 짧은 둥글넓적한 얼굴 형태를 보인다.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코는 짧고 입은 큼직하다. 좁은 어깨에 편단우견(偏袒右肩)의 착의를 하였다. 좌우 협시보살은 머리 위에 상투가 보이며, 본존불상 쪽의 손을 가슴까지 올려들고 반대쪽 손은 아래로 내렸는데, 마모가 심하여 세세한 특징은 보이지 않는다. 개성의 보제사(普濟寺) 금당인 나한보전(羅漢寶殿)의 중앙에 석가 · 문수 · 보현 3상이 있고, 주위에 오백나한이 봉안되었던 점이나, 조선시대 여러 사찰의 응진전(應眞殿)에 석가불과 16나한상이 봉안되었던 것을 참고할 때 성불사 삼존불도 석가삼존불상으로 추정된다.
삼존상 주변의 나한상은 마모가 심하여 세세한 특징은 알 수 없으나 다양한 자세를 보이고 있으며 모두 16구가 배치되어 있다. 각각의 나한상 주위 바윗면을 둥글게 파서 마치 감실이나 동굴 속에 있는 것처럼 표현하였다. 바위면 우측의 나한상은 좌측의 나한상에 비해 비교적 잘 남아 있어 나한상의 유기적 구성을 보여준다. 비교적 형태가 특징적이고 잘 남아 있는 우측 5구의 나한상은 중국 북송대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초까지의 나한상들과 가깝게 비교되며, 특히 자유롭게 바윗면을 새겨나간 것과 작은 나한상의 크기, 조각의 깊이가 비교적 얕은 점, 나한상들의 자세 등 여러 면에서 중국 절강성 비래봉(飛來峰)의 청림동 나한상들과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 국내에서는 바위의 한 면에 석가삼존과 16나한을 부조한 작품은 이 성불사 불상군이 거의 유일한 예이며, 다만 고려시대 불화 중에서 14세기로 추정되는 호암미술관 소장의 석가삼존십육나한도가 있을 뿐이다.
불입상은 고부조(高浮彫)이나 전체적인 형태가 불분명하고 윤곽선만을 살펴볼 수 있다. 하단의 오른쪽 발가락은 뚜렷하게 보이나 왼쪽 발의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바위의 절리현상으로 인하여 얼굴 부분과 신체의 전면이 크게 떨어져나간 것인지 원래 미완성의 상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중국 북송대 나한상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마애상들로서, 약간 딱딱하지만 꾸밈없는 조각기법, 마애상들이 만들어 내는 신앙적 분위기 등이 11세기의 조각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어 이 시기 매애불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