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청주시 상당구 용담동 봉황사에 봉안되어 있으며, 2005년 5월 6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원래 목우사지의 남서쪽 아래 개천 건너에 위치한 목암사(牧岩寺)에 있었던 것으로, 2002년목암사의 승려가 봉황사 주지로 오면서 봉황사로 이관되었다. 목우사지는 와우산토성(臥牛山土城)의 정문이 위치했을 수구부(水口部)에서 물길을 따라 67m 아래쪽 용화사(龍華寺) 소유지의 과수원이 있는 곳으로 전하며,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 초기의 토기편과 청자편, 그리고 다수의 등와편(鐙瓦片)이 출토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목우사는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 초기에 이르는 기간에 존재했을 사찰로 생각되며, 이 석조여래입상 역시 이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높이는 208㎝이며, 불두는 6·25전쟁 때 파괴되어 시멘트에 흰색 칠을 해두었던 것을 2002년봉황사로 옮기면서 새로 조성했다. 남아 있는 목 부분으로 볼 때 삼도(三道)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통형의 신체는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통견식의 착의법을 하고 있다. 두 손은 가슴 앞까지 올려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으며, 왼손은 손등을 앞으로 하여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다. 경주 안압지(雁鴨池) 출토 금동삼존판불상 및 제천 덕주사(德周寺) 마애불입상과 동일한 손 모양을 하고 있는데, 부처님의 최초의 설법을 뜻하는 전법륜인(轉法輪印)인지, 또는 극락으로 인도하는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불의(佛衣)는 통견형식을 하고 있는데, 불상 후면에 조각되어 있는 옷의 형태와 더불어 착의법이 비교적 상세하게 나타난다. 이를 통해서 오른쪽의 옷과 왼쪽의 옷이 서로 다른 옷으로, 승각기(僧脚崎) 외에 두 겹의 옷을 겹쳐 입은 것을 알 수 있다. 승각기의 옷 매듭이 리본형으로 묶여 있어 매듭 자락이 법의 안으로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그 형태와 가운데의 매듭 부분이 고려 초기 작품인 서울 은평구 진관동삼천사지마애여래입상(三川寺址磨崖如來立像)과 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하체 중앙의 옷주름선은 Y자로 갈라져서 가운데에는 지그재그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 같은 옷주름 선은 통일신라시대의 우다야나왕식 금동불입상에서 많이 보이는 형태이다.
양쪽으로 겹쳐진 타원형이 도식화된 옷주름 선은 매우 형식적인데, 거창 양평동 석불입상, 예천 동본동 석불입상, 구례 대전리 석조비로자나불입상 등 하체에서 Y자형으로 내려오는 형태의 옷주름은 신라 말에서 고려시대 석불에서 많이 보이는 형태이다. 불의 밑으로 보이는 치맛자락 역시 가운데로 지그재그형의 옷주름이 내려오며, 양 옆으로 U자형 옷주름이 보인다. 오른손에서 늘어져 내려온 옷자락이 지그재그의 물결형식을 이룬다. 전체적으로 평행계단식으로 옷주름선이 깊게 조각되어 있어 도식화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 후반에서 고려 전반에 걸쳐 유행한 형식이다. 두 발은 마모가 심하며, 왼쪽 발은 모두 파손되어 새롭게 보수하였다.
이 불상의 착의법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Y자형 옷주름을 보이는 석불입상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로 주목된다. 전체적인 형태나 목우사지의 상황으로 살펴볼 때 나말여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이 시기의 양식적 특성을 많이 지니고 있어 석불입상의 변화과정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