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숭선사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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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충주 숭선사지
충주 숭선사지
건축
유적
국가유산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에 있는 고려전기 제4대 광종이 창건한 숭선사의 사찰터.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충주 숭선사지(忠州 崇善寺址)
분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사찰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2003년 04월 25일 지정)
소재지
충북 충주시 신니면 문숭리 862-2번지 외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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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에 있는 고려전기 제4대 광종이 창건한 숭선사의 사찰터.
내용

숭선사는 고려 광종이 954년(광종 5) 어머니 충주 유씨 신명순성태후(神明順成太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한 사찰인데, 현재 절터만이 남아 있다. 숭선사지는 충청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총 4차에 걸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금당지, 강당지, 탑지, 회랑지, 남문과 동문지 등이 확인되었으며, 숭선사의 초창이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나오는 것처럼 954년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아울러 명문 기와와 유구의 변화를 통해서 이 절이 두 차례에 걸쳐서 중창되었다는 점이 밝혀졌는데, 그 시기는 1182년(명종 6)과 1579년(선조 12)이다.

광종은 즉위 직후부터 개경에 불일사를 창건하여 모후의 원당으로 삼았는데, 충주에 새롭게 어머니를 위해 사찰을 창건한 이유에 대해서는 분열된 자신의 지지 세력을 규합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태조 왕건은 충주의 유력한 호족인 유긍달의 딸과 혼인하여 여러 자식을 얻었다. 그중 둘째와 셋째 아들이 고려 정종과 광종이다. 충주 유씨 세력은 정종과 광종의 외척세력이기에 혜종과의 왕위계승전을 벌일 때 적극적으로 정종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후 광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정종세력과 광종세력으로 분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광종이 충주에 숭선사를 건립한 표면적 이유는 어머니의 추복이었지만, 실제는 충주 유씨 세력을 하나로 규합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광종이 숭선사를 창건한 두 번째 이유는 숭선사지의 지리적 위치를 통해서 살필 수 있다. 고려 초기에 충주 유씨 세력이 모여 살았던 지역은 현재의 충주시 성내동 일대인데, 신니면 문숭리 숭선마을에 위치한 숭선사지와는 직선거리로 22㎞ 이상 떨어져 있다. 954년(광종 5)에 건립된 숭선사의 위치는 비슷한 시기에 중창되었던 죽주 봉업사지와 안성 망이산성 등과의 관계에서 고려될 필요가 있다. 봉업사는 숭선사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광종에 의해 중창되었고 망이산성 역시 광종대 중반기에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다. 현재 봉업사지는 숭선사지에서 약 2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망이산성은 숭선사지에서 서쪽으로 약 19㎞ 떨어진 곳에 있다. 즉 숭선사가 자리 잡은 곳은 삼국시대 이래 교통의 중심지였던 죽주 봉업사 일대와 충주 사이의 중간 지점에 해당하는데, 이러한 지점에 광종이 숭선사를 건립한 것은 어머니의 추복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보인다. 숭선사를 현재의 자리에 건립한 이유는 자신의 지지세력인 충주 유씨 세력과의 물리적 소통을 위한 교통로의 안전한 확보를 담보하기 위한 측면이 강하다. 개성을 출발하여 충주로 들어가는 길은 수로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현재의 520번 지방도로와 518번 지방도로가 통과하는 교통로를 이용해야 한다. 숭선사는 사지 북쪽과 남쪽에 위치한 교통로를 모두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조성되었다. 즉 숭선사는 충주의 관문 역할을 하였던 사찰이었다.

광종은 본격적인 황제체제를 구축하기에 앞서 평택의 비파산성과 안성의 봉업사, 안성의 장릉리사지, 안성의 망이산성, 충주의 숭선사 등 관방유적과 사찰을 창건하거나 중창하였다. 광종이 관방유적을 수리하고 동시에 사찰을 세운 이유는 자신의 정책에 반발하는 세력들을 감시하고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광종 집권 중기, 본격적인 구신 숙청 작업에 들어가기 전 광종이 가장 경계했던 세력들은 앞서 왕위에 올랐던 혜종과 정종을 지지했던 세력이었다. 이들은 왕위계승전에서 어느 정도 타격을 입었으나 자신들의 거점 지역에서는 여전히 무시 못 할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광종이 가장 경계했던 세력 중 하나는 바로 진천의 호족들과 청주의 호족들이었다. 진천과 청주는 바로 혜종과 정종의 외척세력들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혜종의 장인으로는 진천의 임희와 청주의 김긍률, 경주의 연예 등이 있었는데 김긍률은 정종의 장인이기도 하였다. 이들 호족은 광종이 등극한 후 표면적으로는 불만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언제든지 왕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세력이었다. 숭선사는 이들이 반발할 경우를 염두에 두고 이를 대비하기 위한 광종의 전략적 구상 속에서 창건된 사찰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태봉과 고려: 석조미술로 보는 역사』(정성권, 학연문화사, 2015)
『충주 숭선사지: 시굴 및 1~4차 발굴조사보고서』(충청대학교 박물관, 2006)
「고려 광종을 보는 또 다른 시각: 미술사와 고고학을 통하여」(정성권, 『한국인물사연구』19, 2013)
집필자
정성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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