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해 장군 묘 출토복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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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해장군 묘 출토복식 창의
이응해장군 묘 출토복식 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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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강원도 원주에 소재한 조선 중기 무관 이응해(李應獬) 장군의 묘를 이장하던 중 수습된 복식 관련 출토품.
정의
2002년 강원도 원주에 소재한 조선 중기 무관 이응해(李應獬) 장군의 묘를 이장하던 중 수습된 복식 관련 출토품.
개설

2006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34점. 2002년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장들마을에서 이응해(1547∼1627) 장군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복식과 염습제구 및 치관제구가 출토되었다. 이응해 장군은 1582년(선조 16)에 무과에 등과하였으며 수군절도사·제주목사·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인물로 출토된 복식류는 17세기 무관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출토된 복식은 단령(團領) 4점, 철릭[帖裡] 6점, 도포(道袍) 3점, 중치막[中赤莫] 7점, 창의(氅衣) 2점, 직령포(直領袍) 3점, 방령(方領) 3점과 과두(裹肚: 동방형누비포) 1점, 주의(周衣: 두루마기형누비포) 1점, 저고리 1점, 단령대 1점, 기타 염습제구 등 34점이다. 2006년 일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충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내용

이응해 장군 묘 출토 복식은 복식과 함께 이불·돗자리 등의 치관류(治棺類) 등 총 34점이 출토되었다. 수백 년간 땅속에 있었기 때문에 본래의 색상이 갈변된 상태이다.

단령은 모두 4점이며 형태는 비슷하나, 부분적으로 단추를 다는 위치나 무를 고정하는 방법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2점은 겹단령이며 나머지 2점은 홑단령이다. 크기는 길이 141∼145.5㎝, 뒷품 52∼53㎝, 화장 116∼120.5㎝의 범위이다. 겹단령은 겉감 단령과 안감 직령을 따로 만들어 끼운 후 무가 있는 부분을 부분적으로 연결한 겹단령 초기 형식이다. 1점은 겉은 얇게 비치는 숙초(熟綃)이고 안은 화조보문단(花鳥寶紋緞)이며 나머지 겹단령 1점은 겉감과 안감 모두 화문단(花紋緞)을 사용하였는데 안감 직령의 경우 연화와 모란 무늬 사이에 새와 경(磬)을 시문한 ‘경축화조문단(慶祝花鳥紋緞)’이다. 홑단령 2점은 모두 숙초로 만들었다.

철릭은 6점으로 겹철릭 2점, 홑철릭 4점이다. 철릭은 상의(上衣)와 주름 잡은 치마형 하의(下衣)가 연결된 옷으로 시대에 따라 상의와 하상의 길이 비례, 주름의 크기, 소매 모양이 달라지면서 다양한 변화를 보인다. 이응해 묘에서 수습된 철릭은 길이 132∼149㎝, 뒷품 56∼59㎝, 화장 120.5∼127㎝ 범위의 크기이며 상하의 비율이 1:1.7에서 1:2까지로 다양하다. 겹철릭 1점은 공단 겉감에 명주 안감이며 아청색이 선명히 남아 있다. 다른 1점은 겉과 안이 명주 겹철릭이다. 홑철릭은 운보문단 2점, 모시 2점인데 운보문단으로 만든 홑철릭 1점은 상의와 하상이 분리된 채로 수습되었으며 소매가 분리되는 탈착식 소매이다.

도포는 3점으로 모두 겹옷이다. 도포는 왕 이하 사대부의 외출복이자 의례복으로 곧은 깃에 넓은 소매가 달렸으며 앞자락의 옆선에 달린 무가 뒷길 안쪽으로 들어가 고정되어 두 층의 뒷자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응해 장군의 도포 중 2점은 앞길에서 넘어 온 사다리꼴 무가 뒷자락 뒷중심선까지 이어져 맞닿아 있으며, 나머지 1점은 뒷중심선에서 12㎝ 정도 벌어져 있다. 2점은 무늬 없는 능직, 1점은 명주를 사용하였다. 치수는 길이 133∼143.5㎝, 뒷품 64∼50㎝, 화장 11.5∼120.5㎝ 정도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창의는 2점으로 모두 겹옷이다. 창의는 임란 이후 입게 된 남자용 포로, ‘대창의(大氅衣)’라고도 하였다. 곧은 깃에 소매가 넓으며 뒷중심선 허리 아래로 긴 뒤트임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2점의 유물 중 명주로 만든 1점은 겉감과 안감 사이에 아주 얇게 솜을 두었으며 트임 시작점에 소형 삼각바대를 대어 터짐을 방지하였다. 나머지 1점은 겉은 화조문단(花鳥紋緞), 안감은 명주로 만든 겹창의로 뒤트임 시작 부분을 굵은 실로 호아 고정시켰다. 치수는 길이 138.5∼140.8㎝, 뒷품 46∼50㎝, 화장 112∼122㎝ 정도이며 뒷중심선 아래에 73.5∼75㎝의 뒤트임이 있다.

중치막은 7점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솜누비옷이다. 남자들의 가장 일반적인 편복포로, 곧은 깃에 옆트임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7점의 중치막 유물은 겉감과 안감 모두 명주를 사용하였고 사이에 솜을 두어 누볐다. 소매모양이 착수에서 광수로 이행하는 과정의 두리소매인데, 겨드랑이에 작은 삼각무가 있으며 아래로 넓은 무가 달린 17세기 전반기의 형태이다. 치수는 길이 113.5∼133㎝, 화장 94∼113㎝, 뒷품 40∼60㎝ 범위에 있으며, 옆트임은 33∼70㎝ 범위이다. 누비의 간격은 1.5∼24㎝ 범위로 누비의 간격과 솜의 두께 등이 다양하다.

직령포는 모두 3점으로 모시 홑직령포 2점, 명주 홑직령포 1점이다. 직령은 조선 전기에는 사대부의 예복이나 외출복으로, 또는 하급관리의 관복으로 입었다. 형태는 단령과 비교하여 곧은깃 형태만 차이가 날 뿐 나머지는 같은데 임란 후에는 단령에 징거지면서 겹단령의 안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응해 장군의 묘에서는 출토된 홑단령의 받침옷으로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길이 135.2㎝, 뒷품 93㎝, 화장 124.7㎝이다.

방령은 모두 3점이 있으며, 방령포 1점과 방령의 2점이다. 방령이란 깃의 모양이 방형(方形)으로 모난 깃을 가진 옷으로 방령의는 모난깃[方領]에 맞깃[對襟], 그리고 짧은 소매와 뒤를 짧게 만든 것이 특징이며 방령포는 길이가 길고 탈착식 긴소매가 달린 옷으로, 마상의(馬上衣)나 무관용 옷으로 기능성이 강조된 옷이다. 방령포 1점의 겉감은 절지모란문단(折枝牧丹紋緞), 안감은 토주(吐紬)로 만든 겹옷이다. 길이 139㎝, 뒷품 52㎝, 화장 131㎝이다. 소매는 넓은 소매이고 탈착식이며 단추 6개가 달렸던 흔적이 남아 있다. 방령의 1점은 사계화보문단(四季花寶紋緞)으로 만들었는데 앞뒤 길이가 같고 옆트임이 있다. 길이 76㎝, 뒷품 58㎝, 화장 64㎝이다. 나머지 1점은 앞길이가 뒷길이보다 긴 것이 특징으로 좌우에 트임이 있다. 겉감은 세화만초문(細花蔓草紋)이며 안은 명주를 사용하였는데 사이에 한지를 심감으로 넣어주었다. 섶상단에는 약 10㎝ 부분에 약 29개의 주름이 잡혀 있다. 옷의 크기는 길이 96.5㎝, 뒷품 61㎝, 화장 52.5㎝이다.

과두 1점은 중치막과 유사하나 품이 넓고 길이가 중치막보다 짧아 승려의 동방포(東方袍)와 유사하다. 유물은 솜을 두어 누빈 것으로 치수는 길이 113.5㎝, 뒷품 60㎝, 화장 94㎝이며 겉감과 안감이 모두 명주이며 소매 안 일부에 사면교직(絲綿交織)이 관찰된다. 옆선에 트임이 33㎝ 있다.

주의는 1점이 있다. 주의는 사방이 두루 막힌 형태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두루마기, 주의(周衣)·주막의(周莫衣)·주방의(周防衣)·주차의(周遮衣) 등으로 사용된다. 유물의 겉과 안은 모두 명주로 하여 두껍게 솜을 둔 솜누비로 겉깃이 칼깃이고 안깃이 반목판깃이며 옆과 뒤에 트임이 없이 막혀 있다. 누비 간격은 7.5㎝이며 치수는 길이 132㎝, 뒷품 50㎝, 화장 108㎝이다. 겨드랑 아래 삼각무와 사다리꼴 큰무가 있다.

저고리 1점은 안에 솜을 얇게 넣어 만든 여자 솜저고리로 길이 54㎝, 뒷품 37㎝, 화장 81㎝이며 겉은 명주로 길을 하고 안감은 토주로 대었으며, 깃은 연화문단(蓮花紋緞), 겨드랑이 한쪽 삼각무는 봉황문단(鳳凰紋緞), 다른 한쪽 삼각무는 화문단을 사용하여 장식하였다.

수의로 단령을 사용할 때는 비단에 띠돈을 그려서 만든 가짜 품대를 사용한다. 이응해 장군의 출토 복식 중 대(帶)는 수의용 단령에 사용된 것으로써 3부분으로 나뉘어져 장미·동백·모란과 대나무 등의 무늬가 있으며 띠돈을 그렸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기타 염습제구로 이불 1점, 지요 1점, 횡교, 종교, 돗자리 등이 있고, 그 외 명주 단편 2점, 모시 단편 16점이 남아 있으며 모두 복식의 부분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이응해 장군 묘에서 출토된 복식의 대부분은 겉옷인 포류(袍類)로 직령·창의·방령·단령 등 그 종류도 다양하여 임진왜란 이후 남성 겉옷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남성용 복식류임에도 불구하고 의복의 구성이 화려해 피장자인 이응해의 생전 심미안을 짐작할 수 있는 격조 높은 옷들로 평가된다. 단령 안은 화려한 꽃무늬가 펼쳐진 비단이며, 겉은 안이 비치는 얇은 숙초(熟綃)로 제작되어 있는 매우 귀한 자료이다. 특히 이응해는 우리나라 복식 변천의 격동기라고 할 수 있는 임진왜란 전후에 생존한 인물이었으므로 당시 복식 변천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써 가치가 크다.

참고문헌

『문화재대관』중요민속자료2 복식·자수편(문화재청 편, 2006)
『이응해장군묘 출토복식』(충주박물관 편, 2004)
『박물관 특별전 이응해장군묘 출토복식』(충주박물관 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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