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개방요, 한데가마라고도 부른다. 최초로 토기가 만들어졌던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초기철기시대·원삼국시대 전기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가장 초보적인 토기생산 가마 형태이다. 가마의 지붕이 없는 개방된 구조이기 때문에 산소의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져 산화염(酸化焰)으로 소성되며, 가마 내부의 온도가 600∼900도 이상 고온을 낼 수 없기 때문에 적갈색 무문토기 또는 연질토기가 생산된다.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 청동기·초기철기·원삼국시대 전기의 무문토기 등은 모두 이러한 가마에서 구워진 토기들이다.
신석기시대의 토기 가마는 아직 정확히 확인된 것은 없으나, 초기에는 지면에 토기와 땔감을 쌓고 불을 지펴서 토기를 굽는 형태에서 점차 얕은 구덩이를 파서 그 안에 토기와 나무·짚 등의 땔감을 쌓아 소성하는 형태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시대에는 가마의 수혈이 원형 또는 타원형으로 정형화되고, 훨씬 크고 깊은 수혈식 노천요의 형태로 정착하였다. 그 후 초기철기·원삼국시대 전기에는 이러한 원형의 수혈식 노천요 이외에 폭이 좁고 길이가 긴 띠상〔帶狀〕의 토기 가마도 나타나는데, 노천요에서 밀폐요(密閉窯)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원삼국시대 전기에는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토기제작기술과 함께 등요(登窯) 형태의 밀폐요가 전래되어 이후 토기 가마의 전형을 이루었다.
가마로 사용된 구덩이는 원형 또는 타원형으로 직경 1m 미만의 작은 것도 있으나, 대개 직경 3∼5m, 깊이 1m 미만의 것이 대부분이다. 구덩이 내부에는 별다른 시설을 하지 않았으며, 평평한 구덩이 바닥에 성형한 토기와 나무·짚 등을 쌓고 지붕을 덮지 않은 채 소성하였다. 내부에서는 많은 토기와 숯, 재, 불에 달구어진 돌 등이 출토되어 토기를 구웠던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신석기시대의 토기 가마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아 그 형태와 구조를 잘 알 수 없으나 청동기시대에 이르면 많은 유적에서 무문토기 생산 가마들이 확인된다. 진주 대평리유적, 부여 송국리유적 등 주로 대규모 마을 유적에서 많은 수의 가마들이 확인되었다. 가마들은 대규모 마을 유적 내부의 별도 구역에 모여 있는 경우가 많으며, 대개 한번에 20여점의 무문토기가 공동 작업으로 생산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청동기시대 취락의 주거지 주변에서 자주 확인되는 원형 또는 타원형 수혈에 대하여 노천요와 더불어 저장공 또는 폐기장 등 다양한 기능이 검토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토기 소성의 흔적이 있는 수혈들은 확실히 무문토기를 생산한 노천요로 판명되고 있다. 노천요는 주로 청동기시대의 대규모 마을 유적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무문토기의 생산이 대규모 마을에서 공동으로 생산되어 유통되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노천요의 실체와 구조 파악 등이 최근에야 이루어진 것이어서 상세한 조업 및 운영 실태는 파악되고 있지 않다. 취락 내에서의 토기생산 시설인 노천요의 공간 배치의 특징, 세부적인 구조 및 특징, 생산된 무문토기의 구체적인 특징, 그리고 주변 지역 노천요와 생산된 무문토기와의 비교 등을 통하여 청동기시대 노천요의 변화과정 및 무문토기 생산 실태와 유통관계, 사회구조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