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철지 ()

선사문화
개념
철 생산과 관련된 작업장이 있던 유적. 제철유적.
이칭
이칭
제철유적
정의
철 생산과 관련된 작업장이 있던 유적. 제철유적.
개설

야철지(冶鐵址)는 철을 생산하고 버리는 모든 작업공정을 포함한 모든 제철유적을 말한다. 제철로, 제련로 또는 정련로, 단야로와 대장간, 그리고 작업장과 부속 시설물로서 풀무, 노 보호시설, 원료 야적장 등을 모두 포함한다. 과거 철생산 관련 유적들이 확인되기 이전에는 제철유적을 가리켰지만, 단순히 ‘철을 생산하는 장소’라는 의미에서 야철지라 부른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제철유적들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야철지의 정의와 범위는 매우 넓어졌으며 현재는 생산작업 과정에 따라서 그 기능을 분리하여 구분한다.

연원 및 변천

우리나라에서 야철과 관련된 기록은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에 따르면 변한과 진한은 철을 생산하고 교역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당시의 철생산과 관련된 모습은 남해안 지역에서 조사된 창원 성산패총, 고성 동외동패총 등 여러 조개더미에서 확인된 노 벽체와 쇠똥을 통해서 확인된다. 내륙에서는 경주 황성동유적, 진천 석장리유적, 화성 발안리·기안리유적 등에서 대규모 철생산 유적이 확인되었다. 또한 원형·방형의 제철로, 제련로, 단야로 등의 노지와 각종 송풍관, 주조철부·거푸집 등이 발견되면서 철광석과 사철을 이용한 철생산이 이뤄졌다는 사실과 철소재로 주조철부를 만들었음이 확인되었다. 초기의 야철지는 해안가나 경주를 비롯한 도성(都城) 주변에 위치했지만 점차 철광산을 중심으로 생산유적이 옮겨가는 모습이 확인된다. 철생산과 관련된 야철지는 전국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고려∼조선시대에는 철소(鐵所)가 설치된 충주 등 여러 지역에서 철광석보다는 사철을 많이 이용하여 철생산이 이뤄진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각지에서 철을 공납품으로 올리면서 각지에 철생산을 위한 철장(鐵場)을 중심으로 생산이 이루어졌다.

야철지에서 확인된 노지와 박편, 쇠똥에 대한 분석 결과, 사철에서 철광석을 이용한 철생산 작업이 이루어졌고, 특히 울산 달천광산, 밀양 사촌리 등 각지의 철광산이 개발되면서 점차 규모가 커져가는 모습이 확인된다.

내용

야철지에서 확인되는 노지는 작업공정에 따라서 구분된다. 제철로와 제련로는 노가 위치한 위치에 따라서 지하식·반지하식·지상식으로 구분되며, 평면 모습에 따라 원형로(圓形爐)와 방형의 상형로(箱形爐)로 구분되는데, 원형에서 방형·장방형으로 노의 모습이 변화된다. 노는 지면에 구덩이를 판 후 바닥에 숯이나 슬래그를 깔아서 습기를 방지한 후, 다시 점토를 다져서 기초를 만든 후 노를 만들었다. 노의 아래쪽에는 배출구를 만들어서 쇳물이 흐르도록 했고, 조업 후에는 경사면 쪽으로 철재(鐵滓)가 빠지도록 했다. 노의 규모는 원형로의 경우 소형은 지름 60∼70㎝이며 대형은 100㎝ 이상이다. 상형로는 길이 225㎝, 너비 45㎝ 정도로 대형 풀무를 통해서 바람을 공급했는데, 조선시대에는 대형화되면서 석축으로 만들었다.

제철로에는 많은 양의 목탄과 철광석이 사용되므로 노지 주변에는 많은 양의 철재가 퇴적되어 있는데, 원료가 사철인 경우에는 티타늄이 확인되며 철광석의 경우에 광산에 따라서 원료가 구분된다. 울산 달천광산에서는 비소가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불순물을 통해서 광석의 산지를 추정할 수 있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광산을 구분할 수 있는 자료는 부족한 상태이다. 야철지에서 노지와 함께 발견되는 유물 중에는 주조철부를 주조하기 위한 거푸집이 있는데, 이것은 안틀과 바깥틀 그리고 속심으로 구성돼 있다. 거푸집은 경주 황성동유적, 대구 봉무동유적 등에서 확인되며 철소재로 주조철부를 생산하였다.

의의와 평가

야철지는 철을 생산한 공방이 위치한 곳으로 철기생산 기술과 철기문화의 변화상을 시대별로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해안가나 도성 주변에 자리잡았던 초기의 야철지는 후대에 철광산으로 그 위치를 옮겨간다. 삼국시대 이후 철광산 주변에 위치하면서 그 규모가 커지고 여러 기가 동시에 철생산을 하기도 했는데, 고려시대에는 철소가 만들어지면서 생산지가 집중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각 지방에서 철을 공납물로 진상하게 되면서 철을 생산하는 철장을 설치하였다.

참고문헌

『진천 석장리 철생산유적』(국립청주박물관·포항산업과학연구원, 2004)
『밀양사촌제철유적』(국립김해박물관, 2001)
『경주 황성동 유적Ⅰ·Ⅱ』(국립경주박물관, 2000)
『경주 황성동 524-9번지 용해로적』(손명조·박문수, 국립경주박물관, 1999)
「경주황성동제철유적의 성격에 대하여」(손명조, 『신라문화』14-1∼3C 경주 지역의 유적과 문화-,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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