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목 초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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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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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학자이자 문신인 허목(1595-1682)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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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 학자이자 문신인 허목(1595-1682)의 초상화.
개설

200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허목의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문보(文甫), 또는 화보(和甫)이고, 호는 미수(眉叟)이다. 벼슬은 우의정까지 올랐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는 당시 학계에서 대현(大賢)과 영수로서 깊이 추앙을 받았으며, 평생 몸가짐이 고결하여 세속을 벗어난 기품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전서에 능하였으며, 그림과 문장에도 뛰어났다.

「허목초상」은 화폭 상부에 제발문이 붙어 있어 그 제작동기를 말해준다. 1794년(정조18) 정조는 허목에 크게 감동하여 채제공(蔡濟恭)으로 하여금 초상화 제작을 사림(士林)들과 의논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7월 은거당(恩居堂 : 1678년 숙종이 허목에게 하사한 집)에서 선생의 82세 초상을 받들어 모셔다가 당대 최고의 화가인 이명기(李命基)로 하여금 이모하게 했으며, 따로 초(綃 : 그림 그릴 비단)를 준비하고, 첩(貼)을 붙여 대궐 내에 두도록 하였다고 한다. 초상의 오른쪽에는 채제공이 당시 가을에 쓴 표제가 붙어 있다.

「허목초상」은 화폭 상부에 제발문이 붙어 있어 그 제작동기를 말해준다. 제발문은 다음과 같다. 1794년(정조 18)에 임금께서 문정공 미수(眉叟) 허목(許穆)을 오래도록 흠모하시어 초상화를 구해 보고자 하여 신(臣) 채제공(蔡濟恭)에게 명을 내렸다. 신은 사림과 의논하여 이에 가을 7월 26일에 경기도 연천 은거당(恩居堂)에서 선생의 82세 초상화를 받들어 서울로 가지고 와 당시의 뛰어난 화가인 이명기에게 모사하여 올리게 하였다. 임금께서 그것을 보시고는 따로 비단을 준비하여 명기에게 이모(移模)하여 첩(幀)을 만들어 궁궐에 두게 하시고 들여온 그림은 그 후손에게 돌려보내라고 하셨다. 이 때 사림에서 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남은 유학의 중심지[鄒魯鄕]입니다. 하물며 순흥(順興)의 백운동(白雲洞)에는 공자 및 성인 4명 공자의 뛰어난 제자인 공문십철(孔門十哲) 10명 70제자의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우리나라로는 신재(愼齊) 주세붕(周世鵬)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같은 선생의 영정이 모두 거기에 있습니다. 지금이 초상화가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로 가겠습니까?” 마침내 논의를 종합하여 순흥서원(順興書院)에 안치하였다. 아! 천하의 학문은 쇠퇴하였지만 유학의 도통은 조선에 있다. 조선에서는 모두 남쪽에 있다. 이제 선생의 초상화도 남쪽에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어찌 사람의 힘으로 그렇게 한 것이랴? 하물며 오리 이원익은 허목 선생의 스승이요 지기이다. 『주역건괘』에서, “같은 소리는 서로 반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찾는다.”고 하였다. 성인께서 우리를 속이지 않았으니 또한 기이하지 않는가? 표제는 내가 썼다. 선생의 성과 이름을 곧장 쓴 것은 임금의 열람을 대비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이 글을 기록함은 후대에 삼가 이 초상화를 배알하는 자로 하여금 이상의 사실을 알고자 함이다. 1794년 9월 15일에 후학 원임(原任) 영의정(領議政) 채제공(蔡濟恭) 75세에 삼가 씀. [十八年甲寅. 上曠感眉叟許文正, 欲得七分小眞以覽, 乃命臣濟恭. 臣與士林議, 乃於秋七月辛亥, 自漣上恩居堂, 奉先生八十二歲眞入京師, 使當世善畫者李命基模以進. 上覽之, 別備綃, 命命基移模作貼, 置諸大內, 所進本還下其後孫. 於是士林合辭言曰. 嶺南鄒魯鄕也. 况順興之白雲洞, 奉孔聖曁四聖十哲七十子寶幀, 我朝如周愼齊 李梧里先生影本, 俱在焉今是眞也非是之歸, 將安之乎. 議送合, 奉詣于順興書院以安之. 鳴呼, 今天下陸沈, 吾道東. 東而盡在於南. 今先生之眞又南矣, 此天之意也. 豈人力所使然哉. 况梧里卽先生之師友知己. 易曰, 同聲相應, 同氣相求. 聖人不我欺也, 不亦奇哉. 標題卽濟恭所書. 直書先生姓諱者, 以仰備御覽而然也. 記之, 使後之祇謁者, 知其事焉. 是年菊秋望日, 後學原任領議政蔡濟恭七十五敬題.]

특징

이 초상화는 복부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인데, 오사모에 담홍색 시복을 입고 서대(犀帶: 물소뿔로 장식된 정1품을 지시하는 띠)를 두르고 있다. 얼굴은 30도 가량 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려 좌안7분면을 취하고 있다. 눈썹은 아래 쪽으로 숙여질 정도로 길게 묘사하였다. 위 눈꺼풀은 검은 선으로 긋고 그 아래쪽에 힌 번 더 갈색선을 그어 주름을 표현하였으며, 아래 눈꺼풀은 갈색 선으로 긋고 속눈썹을 그려 넣었다. 동공의 주위를 어두운 금색으로 칠하고 검은 동자의 바깥부위를 푸른 선으로 그어 서늘한 눈매를 표현하였다. 수염은 흩날리듯 묘사하여 동감을 부여하였으며, 수염 밑으로는 어두운 적색 입술이 보인다. 담홍색 시복의 외곽선은 분홍색 선으로 규정한 뒤 다시 회색 선으로 덧칠하였는데, 이런 규각적인 선묘는 깡마른 몸매를 표현하는데 효과적이다. 82세 상을 이모한 것으로, 미수(眉叟:눈썹이 하얀 늙은이)라는 호에 어울리게 눈썹은 유난히 희게 표현하였고, 야윈 얼굴에서 강직한 성품이 우러나온다.

이 초상화는 허목의 생존시에 화가가 직접 보고 그린 초상화는 아니지만, 현재 원본이 전해오지 않는 실정에서 기품있는 노학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주목된다.

참고문헌

『한국의 초상화』(문화재청,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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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조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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