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년(고종 4년) 거란유종(契丹遺種, 僞遼國人)이 수도 개경까지 침범해와서 황교(黃橋: 개경 宣義門 밖 西郊에 있었던 다리)를 불태우고 물러가자 조야(朝野)가 크게 동요하였다. 이에 음양설(陰陽說)로 최충헌(崔忠獻)의 총애를 받아 낭장(郎將) 벼슬을 받았다가 지태사국사(知太史局事)로 승진한 김덕명이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후릉(厚陵: 康宗의 능)을 속히 개장(改葬)할 것을 건의하였다. 즉, 김덕명은 “현종(顯宗)이 생부인 안종(安宗)을 건릉(乾陵)에 장사지낸 후 경술년(현종 원년)에 거란군이 쳐들어왔는데, 다시 그 곁에 후릉을 장사 지내자 또 거란군이 또 침략해왔다”면서 이는 풍수(風水)의 영향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최충헌은 김덕명의 말을 듣고 사천대(司天臺)를 개장할 길일(吉日)을 택하라고 명을 내렸다.
그러나 판사천대사(判司天臺事)였던 최계량은 후릉 개장에 반대하여 그 명령을 미루고 즉시 날을 받지 않았다. 이에 같은 해 최충헌은 최계량을 고란도(高鸞島: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원산도리)로 유배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