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계량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에, 판사천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주요 관직
판사천대사
관련 사건
후릉 개장(改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고려 후기에, 판사천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생애 및 활동사항

1217년(고종 4년) 거란유종(契丹遺種, 僞遼國人)이 수도 개경까지 침범해와서 황교(黃橋: 개경 宣義門 밖 西郊에 있었던 다리)를 불태우고 물러가자 조야(朝野)가 크게 동요하였다. 이에 음양설(陰陽說)로 최충헌(崔忠獻)의 총애를 받아 낭장(郎將) 벼슬을 받았다가 지태사국사(知太史局事)로 승진한 김덕명이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후릉(厚陵: 康宗의 능)을 속히 개장(改葬)할 것을 건의하였다. 즉, 김덕명은 “현종(顯宗)이 생부인 안종(安宗)을 건릉(乾陵)에 장사지낸 후 경술년(현종 원년)에 거란군이 쳐들어왔는데, 다시 그 곁에 후릉을 장사 지내자 또 거란군이 또 침략해왔다”면서 이는 풍수(風水)의 영향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최충헌은 김덕명의 말을 듣고 사천대(司天臺)를 개장할 길일(吉日)을 택하라고 명을 내렸다.

그러나 판사천대사(判司天臺事)였던 최계량은 후릉 개장에 반대하여 그 명령을 미루고 즉시 날을 받지 않았다. 이에 같은 해 최충헌은 최계량을 고란도(高鸞島: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원산도리)로 유배보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의 무인정권』(김당택, 국학자료원, 1999)
「최충헌 정권 연구」(김대중, 서강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3)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