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출신과 가계 등은 기록에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무신집권자 최우(崔瑀)의 문객으로서 도방(都房)에서 활동하던 장군이었다. 1243년(고종 30) 12월 최우는 자신의 후원을 꾸미기 위해 박승분으로 하여금 안양산(安養山)의 잣나무를 강도(江都: 강화도의 임시수도)로 옮겨오도록 했다. 박승분은 이 일의 총책임을 맡아 노역을 독려하였다.
안양산은 당시 수도였던 강화도에서 운반에 며칠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박승분은 백성들을 동원해 나무를 운반시켰는데, 추위로 인해 일꾼 중에서 얼어 죽는 사람까지 생겼다. 이로 인해 나무를 운반하는 길가에서 살던 사람들은 집을 버리고 산으로 도피할 정도였다. 당시 어떤 사람은 강화 궁궐 승평문(昇平門)에 방을 써붙여, “사람과 잣나무 중 어느 것이 귀중하냐”고 비난하였다. 이것은 강도 지배층의 호화스러운 생활과 사치를 위해 육지 백성들이 고된 노역에 죽어나가는 참상을 풍자한 것이다. 최우가 자신의 저택 후원을 사치스럽게 꾸밀 수 있었던 것은 강화천도(江華遷都) 이후 천도항쟁이 비교적 성공하고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박승분은 그러한 무신집권자의 심복 장군으로서 지배층의 이해관계에 충실한 임무를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