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출신과 가계 등은 기록에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충주 승려로서 몽고군이 1231년(고종 18) 충주읍성을 침략해왔을 때, 노군잡류별초(奴軍雜類別抄)에 속하여 적을 물리쳤다. 당시 충주 부사(副使) 우종주(于宗柱) 등 지방관들과 양반별초(兩班別抄)는 모두 도망쳤다. 그러나 이들이 돌아와 은그릇을 점검하면서 그 수효가 줄어든 것을 보고 노군(奴軍)을 의심했다. 이로 인해 호장(戶長) 광립(光立) 등은 노군의 우두머리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지만, 오히려 노군이 이를 알아차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무신집권자 최우(崔瑀)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안무별감(按撫別監) 박문수(朴文秀)와 김공정(金公鼎) 등을 파견했다. 승려 우본이 노군도령(奴軍都領) 영사(令史) 지광수(池光守)와 더불어 정부의 회유책을 수용하자 최우는 이들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포상하였다. 그 결과 지광수는 무관직인 교위(校尉)에, 우본은 충주 대원사(大院寺) 주지에 임명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우본은 노군을 규합하여 충주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는데, 우본은 재지세력 및 상급 승려들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최우정권은 상장군 이자성(李子晟)에게 3군(三軍)을 이끌고 토벌하게 하였다. 이 때 노군의 우두머리 중에서 몇 사람이 달천(達川)에서 정부군을 만나 항복을 제의해왔다. 정부군이 그들의 항복을 수락하자 그들은 주모자 우본을 살해하였으며, 충주 노군의 반란도 최종 진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