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도감(理學都監)의 설치시기와 목적에 대해서 자세히 전하는 바는 없다. 1372년(공민왕 21) 이학도감에 교수관(敎授官)을 두었다고 한 기록을 보아 1372년 혹은 그 이전에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교수관을 둔 것은 이학(理學) 즉 성리학(性理學)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라 여겨진다.
공민왕은 1353년(공민왕 원년) 2월에 국학(國學), 12도(十二徒), 동서학당(東西學堂)을 수리하고 생도들을 양성할 것을 천명하였다. 1363년(공민왕 12)년 5월에 성균관(成均館), 12도, 동서학당과 모든 주·군(州郡)의 학교에서 특별히 교육에 노력하여 인재를 양성하라고 하였다. 이후 1371년(공민왕 20) 12월에 교서를 내려 중앙의 성균관으로부터 지방의 향교(鄕校)에 이르기까지 문·무(文武) 두 학과목을 개설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관리 등용을 준비하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공민왕은 즉위하자 국학과 성균관, 12도, 동서학당, 지방의 향교 등에서 인재 양성을 위해 노력할 것을 역설하고, 그 후 1372년 이학도감에 교수관을 두었던 것이다. 그 당시 교수관을 둔 것은 기존 교육정책에 대한 반성과 성리학 교육으로의 새로운 변화를 의미한다. 이후 1391년(공양왕 2) 2월에 서울 5부(五部)와 서북면(西北面)의 부(府)·주(州)에 유학교수관(儒學敎授官)을 두었고 1392년(공양왕 3) 정월에는 각 도의 목(牧)과 부에도 이를 두었다. 이렇게 유학교수관을 중앙과 지방에 두루 파견한 것은 성리학이 불교를 대신하여 고려사회를 개혁하여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정치이념으로 수용하기 위한 것이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