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변 철옹성 ( )

철옹성 남문
철옹성 남문
정치·법제
유적
북한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성곽. 성곽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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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영변 철옹성은 북한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성곽이다. 둘레가 본성이 14㎞, 약산성이 1㎞, 신성이 3㎞, 북성이 2㎞이며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가 6~7m이다. 고구려 때 처음 쌓은 이래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성벽을 쌓은 방법은 지형 조건에 따라 다르다. 11세기 초에 거란을, 1236년에는 몽골군을, 고려 말에는 홍건적을, 1636년에는 청나라군을 각각 물리친 바 있다. 북한 성곽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자 외적들을 물리친 역사성을 가진 성이다. 북한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63호이다.

정의
북한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성곽. 성곽터.
개설

영변철옹성은 본성, 약산성, 신성, 북성 등 4개의 부분성으로 이루어졌다. 영변읍을 돌아 쌓은 본성과 본성 안의 서쪽 부분을 구획한 약산성은 고구려 때의 성이고, 그 밖의 부분성들인 북성과 신성은 그 이후에 쌓은 성이다. 이 성들을 포괄하여 일반적으로 영변철옹성 또는 철옹성이라고 부른다. 북한에서는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63호로 지정해 놓고 있다.

역사적 변천

영변철옹성은 고구려 때 처음 쌓은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서북방 방위의 중요한 거점으로 이용되면서 1416년, 1684년, 1733년, 1753년 등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축성비에 의하면 조선 초기인 1416년(태종 16)에 3만 600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27일간이나 공사를 하였고, 1683년(숙종 9)에는 본성 안의 서남 부분을 막아 신성을 쌓았으며, 1684년(숙종 10)에는 본성 안의 서북 부분을 막아 북성을 쌓았다고 한다. 1725년(영조 1)에는 약산성을 개축하였다.

내용

영변철옹성은 둘레가 본성이 14㎞, 약산성이 1㎞, 신성이 3㎞, 북성이 2㎞이며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가 6~7m이다. 성벽을 쌓은 방법은 지형 조건에 따라 다르다. 약산성의 동, 서, 북 삼면은 절벽을 그대로 성벽으로 삼고 남쪽 일부 구간에만 성벽을 쌓았다. 본성은 산봉우리와 능선 부분 바깥 면에는 외면 축조 방법을, 골짜기를 건너는 부분과 성문 좌우 부분에는 양면 축조 방법을 적용하였다.

약산성과 본성의 성벽은 4각추 형태로 다듬은 성돌을 정연하게 축조하였다. 약산성은 사방이 절벽으로 된 약산 위에 평평하게 생긴 대지를 둘러막은 산봉식의 성이며 본성은 약산성 동쪽 성벽밖에 잇대어 영변읍을 싸고돌면서 남쪽의 남산, 동쪽의 모란봉, 북쪽의 진망산 등의 봉우리들과 능선을 따라 쌓은 고로봉식의 성이다. 약산성과 본성의 성벽 윗부분은 전투에 편리하게 성 안의 지면에 맞추어 평평하게 만들고 성벽을 따라가면서 여장(성가퀴)을 돌렸다. 여장에는 활이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의 구멍을 냈다. 약산성의 성문은 본성에 드나들기 편리한 동남쪽에 홍예문길을 낸 큰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문루를 세웠다. 약산성 안에 있는 봉수대에는 5개의 화돌이 본래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신성은 남산에서 영변읍을 향해 능선을 타고 북으로 뻗다가 다시 서쪽으로 올라 약산성에 닿게 했으며 북성은 본성의 서북쪽 안으로 쌓았다. 신성과 북성의 성벽은 양면 축조 방법으로 크기가 고르지 않은 돌들을 아래에 자갈을 고여 가면서 쌓았다. 본성에는 동, 서, 남, 북 네 면에 문을 냈다. 현재는 1789년에 고쳐 세운 남문만 남았는데 2층으로 된 아름답고 웅장한 문루가 서 있다. 이 성의 북문 밑에는 4개의 홍예문길을 내서 성 안의 물이 흘러내리게 하였다. 신성에서 본성으로 드나들던 성문의 아치 부분은 6톤의 쇳물을 부어 만들었는데 일제가 파괴하였다.

그 밖에 매개 부분성들에는 서로 통하는 작은 문들과 성 밖으로 나드는 암문들이 있었다. 남산에는 남장대, 약산성에는 서장대(약산동대), 진망산에는 북장대, 모란봉에는 동장대 등 4개의 장대를 두고 망루를 세워 적을 감시하였다. 성 안에는 3개의 골짜기로 흐르는 깨끗한 물과 50개나 되는 우물이 있어 수원이 풍부하였다. 성문 밖에는 고구려 시기의 무덤들이 분포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영변철옹성은 북한 성곽 연구의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북방에서 쳐들어온 외적들을 물리친 역사성을 가진 성이다. 11세기 초에 거란이 여러 차례 쳐들어왔지만 그때마다 철옹성을 지키던 고려군들과 백성들이 격퇴하였다. 또한 1236년에는 몽골군을, 고려 말에는 홍건적을, 1636년에는 청나라군을 각각 물리친 바 있다.

참고문헌

『조선향토대백과』5(평화문제연구소, 2005)
『북한의 문화재와 문화유적』Ⅰ(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북한문화재 자료관(north.nricp.go.kr)
북한지역정보넷(www.cybern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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