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7년후금(後金)이 쳐들어 왔을 때 안주병사 남이흥(南以興)은 안주성보위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때 전사한 남이흥을 비롯한 49명의 의사들을 기념하여 1710년에 사당인 충민사를 짓고 비를 세웠다. 비는 사각받침돌 위에 올렸고, 그 높이는 3.01m이다. 글은 남구만(南九萬)이 짓고, 글씨는 조상우(趙相愚)가 썼다.
비문에 의하면 충민사는 정묘호란 때 순절한 평안병사(平安兵使) 남이흥(南以興) 및 그 수하 장수들을 제향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1681년(숙종 7년)에 국가의 특명에 의하여 평안북도 안주(安州)에 세웠으며, 이듬해에 충민사라고 사액되었다고 한다. 비명은 1627년(인조 5년) 후금(後金)이 침입하자, 당시 평안병사였던 남이흥이 인근 수령들을 규합하여 안주에서 이를 저지하다가 전몰한 당시의 급박했던 사정과 그의 공훈 그리고 남이흥의 행장 등을 기술하고 있다. 제향인물을 보면, 남이흥과 그 수하 장수인 평안우후(平安虞候) 박명룡(朴命龍), 안주목사 김준(金浚)을 병향(橙享)하고, 강계부사 이상안(李尙安), 구성부사(龜城府使) 김상의(金尙毅)·이희건(李希建), 영유현령(永柔縣令) 송도남(宋圖南)을 서무에 배향하였다. 그리고 개천군수(介川郡守) 장돈(張暾), 태천현감(泰川縣監) 김양언(金良彦), 맹산현감(孟山縣監) 송덕영(宋德榮), 훈련봉사(訓鍊奉事) 김언춘(金彦春) 등을 동무에 각기 배향하였다고 한다. 충절을 표창하기 위하여 국가에서 건립하였던 관계로 1871년(고종 8년) 대원군에 의한 서원철폐 때에도 그 훼철 대상에서 제외되어 존속하였다. 정묘호란 당시 안주 싸움과 남이흥을 비롯한 그 수하들의 공적을 자세하게 묘사한 사묘비(祠廟碑)로서 정묘호란 연구에 도움이 되는 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