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경성 탑동에서 출생, 관립한성외국어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10년부터 10여 년간 중국 북경평민대학에서 유학했다. 불교진흥회의 전임서기와 불교진흥회 기관지인 『불교진흥회월보』와 『조선불교계』, 『조선불교총보』의 기자를 역임하며 문화적 계몽운동인 거사불교운동을 펼쳤다. 늘 가난에 시달리고 가정적으로 불운했던 그는 1930년대 후반부터 정신질환을 앓다가 1944년 2월 7일 사망하였다.
주로 백화(白樺), 국여(菊如)의 필명으로 활동한 양건식은 『불교진흥회월보』의 편집 책임을 맡으면서 여기에 불교적 색채가 짙은 소설 「석사자상(石獅子像)」(1915)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석사자상」은 비참함 민중의 삶에 대한 애정과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비판한 작품이다.
그의 소설로는 소설가 자신이 작품을 써서 출간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이색적인 작품인 「귀거래(歸去來)」(1915),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낸 「슬픈 모순」(1918) 등이 대표적이다. 평론 중에서는 문학의 미적 가치를 중시하면서도 효용적 가치의 인정을 주장한 「춘원(春園)의 소설(小說)을 환영(歡迎)하노라」(1916)와 「지나(支那)의 소설(小說)과 희곡(戱曲)에 대하여」(1917)가 있다.
양건식은 소설과 평론 외에 중국의 시, 소설, 희곡 문학을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하였다. 이에 이광수는 그를 ‘조선 유일의 중화극 연구자요 번역가’로 평가한 바 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희곡이란 용어를 사용하였고, 「홍루몽(紅樓夢)」, 「비파기(琵琶記)」 등 일제 강점기 한국에 소개된 중국 희곡 중 3분의 1 정도를 번역하였다고 한다. 그의 번역과 연구는 당시 일본문학과 서양문학 중심의 한국문단에 새로운 시사점을 제공하였다.
양건식은 1913년부터 1940년까지 총 200여 편에 달하는 소설과 평론, 중국문학의 번역과 연구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 한국 신문학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