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출신의 서양화가로 1933년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를 졸업했다. 김용준(金瑢俊)과 함께 도쿄미술학교 졸업생들이 중심이 된 동미회(東美會)를 이끌면서 조선의 자연과 환경을 담아 조선의 현실을 표현할 것을 주장하였다.
수원에서 태어나 1928년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오카다 사부로스케( 岡田三郞助)를 사사했다. 유학 중이었던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첫 출품하여 「교외의 방화수류정(郊外の訪花隨柳亭)」으로 특선을 수상했다. 1930년 4월 김용준, 길진섭 등 동경미술학교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동미회(東美會)를 결성하고 창립전에 작품을 출품했으며 5월에는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성의 서문(城の西門)」, 「여인과 꽃(女と花)」, 「화홍문(華虹門)」 등 3점을 무감사 출품하였다. 1931년 2회 동미회전을 주도하면서 조선의 현실을 파악하고 조선의 자연과 환경을 표현하자는 미술론을 펼치기도 했다. 1933년 4월 수원공회당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제12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코스튬(コスチュ-ム)」으로 입선했다.도쿄미술학교 출신으로 구성된 목일회(牧日會)가 목시회(牧時會)로 명칭이 변경된 후, 1937년 6월에 이마동, 백남순, 임용련, 장발 등과 함께 참여하여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제2회 전람회를 가졌다. 1930년대 후반에는 『동아일보』에 삽화가로 활동하면서 한설야의「청춘기」(1937년), 주요섭의 「길」, 이기영의 「신개지」(1938년) 등 소설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해방 직전에는 황해도 재령 명신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활동하였고, 당시에 화가 박창돈[예명: 박돈(朴敦)]에게 미술과 인생에 대하여 깊은 감화를 주었던 것으로 전한다.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