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평양방송국 개국 기념 공연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해, 1937년 「연락선은 떠난다」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데뷔했다. 이후 오케레코드와 조선악극단의 간판급 가수로 부상했다. 광복 이후에도 1950년대 초까지 악극 무대에 계속 서는 한편 「울어라 은방울」, 「샌프란시스코」 등 대표곡을 발표하며 인기를 이어 갔다. 1970년대 초까지도 공연과 방송을 통해 꾸준히 활동했다.
1921년 평양 출생 .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악기점 점원으로 일하다가 오케레코드 운영자 이철에게 발탁되어 가수가 되었다. 1937년에 정식으로 데뷔한 이후 오케레코드에서 이난영에 버금가는 인기 가수가 되었고, 이철의 연인이 되어 아들 둘을 낳기도 했다. 이철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오케레코드 관련 공연단체인 조선악극단의 프리마돈나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으나, 1944년 이철이 병사한 뒤 한동안 홀로 지내다가 연주가 한두식과 결혼했다. 1960년대에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전후해 여러 차례 일본 공연에 참가하기도 했다. 1973년 무렵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지병이 악화되어 오랫동안 투병하다가 2003년에 사망했다.
데뷔 당시에는 청순한 음색과 이미지로 인기를 모았으나, 1940년 일본에 일시 체류하며 성악 발성을 익힌 뒤로는 세미클래식풍 창법을 구사하게 되었다. 그를 바탕으로 1940년대 악극 무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가수가 되었고, 음반을 통해서도 「백팔염주」(1949년) 같은 독특한 작품을 발표했다. 1941년부터 부른 군국가요 가운데「지원병의 어머니」는 일본의 유명한 군국가요를 번안한 작품이며, 남인수와 함께 부른 「그대와 나」는 조선군 보도부에서 내선일체와 지원병을 선전하기 위해 제작한 영화의 주제가였다. 조선총독부 척무과와 만주국 개척총국 및 매일신보사가 공동으로 주최해 조직한 만주건국10주년기념만주개척촌위문연예단의 단원으로 만주에 파견되었다. 김백희ㆍ심연옥ㆍ백설희 등 조선악극단 출신 후배 가수들의 전범(典範)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