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 유적은 198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를 처음 발굴조사 한 이후 한림대학교박물관, 강원문화재연구소, 예맥문화재연구원에 의하여 지속적인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신석기~삼국시대에 이르는 주거지와 무덤이 밀집 분포한 복합유적이다. 이 유적은 삼악산지 동쪽 범람원에 위치하고 있는데, 신매리 범람원은 춘천분지 북서쪽, 북한강의 좌측에 위치한 남북으로 긴 기름진 범람원지대이다. 신매리유적 주변 지역은 춘천분지에서도 가용 면적이 넓고 용수의 공급이 원활한 가장 좋은 평야지대에 위치하며, 신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취락과 무덤이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신석기시대 유적은 신매리 남쪽 부분(114-3번지 일원)에서 빗살무늬토기편[櫛文土器片]이 수습되었다. 청동기시대 유적은 1981, 1984년 국립중앙박물관, 1982년 국립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 1984, 19951996년 한림대학교박물관, 20022005년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주거 유적과 분묘 유적이 발굴조사된 바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하여 발굴조사된 신매리 지역 남쪽 부분에서는 상부의 덮개돌이 결실된 고인돌[支石墓] 3기와 장방형 주거지 2기 및 노지 1기 등이 확인되었다. 한림대학교박물관에 의하여 조사된 신매대교 접속도로 부지에서는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 유적이 중복된 채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조사된 신매리 820번지에서는 주거지 10기와 원형 유구 1기, 54-4번지에서는 주거지 8기, 47-1번지에서는 주거지 1기, 신매리 10번지에서는 주거지 5기가 발견되었다. 또한 신매리 14번지에서는 철기시대 분묘 유적인 돌무지무덤[積石塚] 1기가 보고되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조사된 신매 3리 177-14번지 야산 말단부에서는 고분 1기도 조사되었다.
신매리유적에서 빗살무늬토기 편들이 지표에서 수습된 바는 있었으나, 실제 발굴조사에서 신석기시대 유구가 확인된 사례는 신매리 10번지 유적이 처음이다. 신매리 10번지 유적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12호 주거지는 평면 형태가 말각방형을 하고 있었고, 이 내부에서 천석(川石)을 원형으로 돌린 위석식 노지가 확인되었다. 주거지 내부 퇴적토와 지표에서 수습된 빗살무늬토기의 양상으로 보아 신석기시대 말기로 판단된다.
강원 영서지역 청동기시대 주거지의 편년은 현재까지 조기, 전기, 중기, 후기의 네 시기로 구분된다. 각목돌대문토기(刻目突帶文土器)를 공반한 위석식(圍石式) 노지(爐址)를 갖춘 방형의 대형 주거지는 정선 아우라지유적, 홍천 철정리유적Ⅱ, 홍천 외삼포리유적 등에서 확인되었는데, 청동기시대 조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구순각목공렬문토기(口脣刻目孔列文土器)가 공반되는 수혈식 혹은 위석식 노지를 갖춘 세장방형 주거지는 화천 용암리 유적과 춘천 거두리유적 등지에서 조사되어 청동기시대 전기로 볼 수 있다. 일단경식(一段莖式) 석촉, 일체형(一體形) 석촉과 함께 이색(異色) 점토 밀집구역, 작업공(作業孔) 등 내부시설을 갖춘 장방형 주거지는 화천 용암리유적, 춘천 천전리유적, 춘천 우두동유적 등과 비교할 때, 청동기시대 중기로 편년된다.
신매리유적 상층의 주거지 연대는 서기전 2세기서기 전후로 연결시킬 수 있고, 공렬토기가 출토되는 문화층은 서기전 105세기 사이로 상정된다.
신매리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1984년 한림대학교박물관에 의한 고인돌과 주거지를 발굴하면서 이루어졌다. 고인돌은 신매 1리에서 3기, 신매 2리에서 2기가 확인되었다.
신매 1리의 고인돌은 탁자식으로 석재 등 유물의 상태가 원래의 자리를 잃고 완전히 교란되었는데, 상석(上石 : 덮개돌)의 규모는 300×210cm이고, 장축 방향은 남북 방향이며, 상석의 상면에는 10개의 성혈(性穴 : 홈구멍)이 조사되었다. 신매1리의 2호 고인돌 역시 탁자식이다. 상석의 규모는 310×180cm이고, 장축 방향은 남-북향이며, 하부 적석의 틈에서 무문토기 1점이 출토되었다. 신매 1리의 3호 고인돌은 탁자식으로 2호 고인돌에서 동북쪽으로 13m 떨어져 있는데, 상석의 규모는 150×340cm이며, 상석 위에 지석으로 보이는 120×170cm인 석재가 있었으며, 상석의 상면에는 33개의 성혈이 파여 있다. 신매 2리의 1호고인돌은 상석으로 추정되는 장방형 판석이 지상에 남아 있었는데, 그 규모는 120×160×50cm이고. 신매 2리의 2호 고인돌은 크기가 4×5.5m 범위로 넓게 조성된 적석부(積石部)의 중앙에 상석과 석관부(石棺部)가 자리잡은 탁자식 고인돌이다. 장축은 남북방향이고, 남쪽 단벽은 유실되었으며, 북쪽은 판석 3매로 막아져 있다. 석관(石棺) 바닥은 작은 돌들이 깔려있다. 석관 내부에서는 1×1.5cm 크기의 부정형의 골편 1점이 출토되었다.
신매리 일대의 고인돌은 모두 탁자식이며, 석관을 둘러싼 넓은 범위에 적석을 조성한 특징을 하고 있다. 이런 고인돌은 신매리유적에서 약 2km 떨어진 춘천 중도에서도 5기가 발견된 바 있다.
한림대학교박물관이 조사한 신매대교 접속도로 부지에서는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 유적이 중복된 집단 취락 유적이 확인되었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대부분 무시설식 노지(爐址)를 갖춘 전형적인 ‘역삼동식’ 유형의 주거지이다. 간혹 위석식 노지를 갖춘 ‘가락동식’ 유형의 주거지도 발견되었다. 이들 주거지 내부에서는 이중구연토기(二重口緣土器 : 겹아가리토기)를 비롯하여 공열토기(孔列土器), 구순각목토기(口脣刻目土器), 고배(高杯 : 굽다리토기), 홍도(紅陶) 등의 토기류가 주로 출토되었다. 이외 이단병식(二段柄式) 석검, 단면 능형의 이단경식(二段莖式) 석촉, 단면 편평육각형의 삼각만입형석촉(三角灣入形石鏃) 등이 공반 출토되었다.
신매대교 부지에서는 청동기시대 유적과 중복된 채로 철기시대 유적이 확인되었는데, 2기의 주거지와 1기의 소형유구, 1기의 구상유구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조사한 신매리 54-4번지 유적에서는 철기시대 주거지 6기, 신매리 47-1번지 유적에서는 철기시대 주거지 4기와 원형 유구 1기가 발견되었다.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와 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신매리 47-1번지에서는 원형점토대토기(圓形粘土帶土器)와 철제환두소도(鐵製環頭小刀)가 출토되었다.
철기시대 분묘 유적으로는 신매리 14번지에서 돌무지무덤 1기가 보고되었다. 규모는 남북 길이가 20m이고, 동서 폭은 13m이며, 최고 높이는 3m이며, 현재 동 · 서면은 민가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고, 북면은 소로 경계면이며, 남면은 민묘의 조성으로 인하여 대부분 파괴되었다.
역사시대 유적으로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하여 1982년에 조사된 신매 3리 177-14번 야산 말단부에서 고분 1기가 확인되었다. 고분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부장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고분의 구조와 형태로 보아 고구려 계통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신매리 10번지 유적의 서쪽인 신매1리 306번지에서도 삼국시대 고분 출토품으로 추정되는 삼이부호(三耳附壺) 1점, 토기호 1점, 토기완 4점, 장경호 1점, 토기병 1점, 고배 뚜껑 2점이 발견 매장유산으로 신고된 바가 있다.
춘천 신매리유적은 신석기시대삼국시대에 이르는 주거지와 무덤이 밀집 분포된 복합유적이다. 기존 조사에 의하면, 북한강 상류 유역에서는 3시기의 무문토기 유형(類型) 혹은 시기(時期)가 층위상으로 확인되었고, 이어서 철기문화층이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2008년도 북한강수계 제방 보강공사구역 발굴에서 돌대문토기(突帶文土器)가 출토된 주거지가 공렬토기 주거지에 의하여 파괴된 사실로 보아 두 문화층이 서로 시기를 달리함이 밝혀졌다. 그리고 20032004년 신매리주차장 부지 발굴에서 공렬토기 주거지와는 다소 특색을 달리하는 유형의 존재가 입증되었다. 아울러 신매리의 넓은 지역에 걸쳐서 소위 ‘중도식(中島式)’ 토기문화의 취락이 형성되어 있음도 밝혀졌다.
신매리유적은 일찍부터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삼국시대의 취락과 고분 유적이 함께 분포되어 있는 복합유적이이며,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이른 시기에 속하는 주거지와 유물들이 다수 확인되었고, 철기시대의 주거지와 유물들이 또한 다수 출토되어 선사시대와 역사시대 초기에 우리나라 동북지역과 한강유역을 연결하는 지점에 위치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