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항일연군은 「동북항일연군통일군대건제선언」에 따라 1936년 3월 만주지방에서 항일무장운동을 통합해 항일연합전선을 형성하기 위하여 동북인민혁명군을 확대하여 만든 항일무장단체이다. 1936년에서 1937년까지 동만주, 남만주, 북만주 등에서 일본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중국인과 한인의 연합부대로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이 대거 참여하여 큰 활약을 하였다. 해방 후 북한 정권 수립과정에 참여한 다수가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1945년 해방 후 당과 군의 요직을 차지하며 북한 정권 창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만주지역 모든 항일무장운동을 통합하여 항일연합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제일로군 1군 군장 겸 정치위원에 양징위[楊靖宇], 참모장에 안광훈(安光勳), 2군 군장에 왕더타이[王德泰], 정치부주임에 전광(全光), 제이로군 1군 군장에 왕야신[汪雅臣], 제삼로군 1군 군장에 치처중[祁致中], 정치부주임에 김정국(金正國) 등이 임명되었다.
제7차 코민테른 이후 중국공산당과 만주성위는 한인으로만 조직된 별도의 항일부대 창설을 고려하였으나, 김일성 등 한인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이후 중국공산당이 만든 동북인민혁명군이 확대 개편된 동북항일연군은 1936년 3월부터 1937년 10월까지 개편작업을 계속하여 제1군부터 제11군까지 편재되었다. 이중 제1 · 2군은 남만주에서, 제4 · 5 · 7 · 8 · 10군은 동만주에서, 제3 · 6 · 9 · 11군은 북만주에서 활동하였다.
1936년에서 1937년까지 동북항일연군은 동만, 남만, 북만 등에서 큰 세력을 이루고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중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 다수의 한인들이 대거 참여하여 큰 활약을 하였다. 이후 1938년 남만주의 군은 제1로군, 동만주의 군은 제2로군, 북만주의 군은 제3로군으로 재편성되었다.
당시 1만 여명에 달하는 동북항일연군의 활동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1937년부터 ‘만주국치안숙청계획’을 세우고 동북지역 일본군의 수를 70만 명까지 확대하였다. 일본군의 강력한 토벌작전과 고립정책으로 인해 동북항일연군은 게릴라전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40년대 들어 사실상 궤멸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1940년 가을부터 남은 대원들은 점차 소련 경내로 도피하였다. 동만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일성 등 일부 생존자들도 1940년 12월 중순 훈춘을 거쳐 연해주로 피신하였다.
국경을 넘은 김일성 등의 제1로군 부대는 제2로군의 일부와 함께 연해주 보로실로프 근처에서, 제3로군과 제2로군 다수는 하바로프스크 근처에 주둔하였다. 1940년 12월 두 조직이 재편성되었고, 1942년 8월 소련극동군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대원들을 ‘소련적군88특별저격여단’으로 정식 개편하였다.
소련은 러 · 일중립조약(1941.4.13)을 의식하여 교도려대원들을 통제하고 본격적으로 대일작전에는 투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5년 8월초 러 · 일전쟁이 발발하자 교도려의 일부 한인들은 소련군과 함께 대일작전에 참가하게 되지만, 참전하지 못한 다수의 한인대원들 중 일부는 연변으로 진출하고 나머지는 그해 9월경 소련군을 따라 귀국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은 만주국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항일 전투 및 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특히 열차 습격이나 헌병대를 공격함으로써 일제 침략의 상징물에 대한 파괴에 집중하였다. 또한 국내진공 작전을 펼쳐 평안북도 일대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전개하였다. 제2군 제4사와 제6사는 함경북도 무산과 갑산으로 진출하여 국내 진공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였고, 리홍광은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을 기습하여 커다란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동북항일연군은 중국인과 한인의 연합부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동북항일연군 가운데 한인이 많았던 1군과 2군은 한인과 중국인의 연합이었다. 약 2천 명으로 추정되는 동북항일연군 제2군의 경우 절반이 한인이었고, 김일성이 이끄는 제3사는 대부분이 한인이었다.
동북항일연군 최고간부로 활동했던 저우바오중은 해방 이후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항일연군 제2군은 동시에 ‘조선인민혁명군’이었다. 항일유격전쟁 중 중 · 조 인민은 공동사업을 위하여 선혈로 맺어져 있었다.”라고 회고하였다.
해방 후 북한 정권수립과정에서 참여한 다수가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었다. 김일성은 왕청유격대 정위를 거쳐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2군 6사 사장, 1938년에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군장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1937년 6월 김일성이 제1로군 제2군 소속으로 감행한 보천보 전투는 김일성의 권력독점 및 유일체제 성립의 유력한 기반이 되었다.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과 제2로군에는 한인대원이 많았기 때문에 동북항일연군은 사실상 중국인과 한국인의 항일연합전선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동북항일연군은 해방까지 군대의 독자성을 유지하기 어려웠으며 실질적으로도 중국 측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 북한 정권 수립과정에 참여한 다수가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북한과 중국의 인적 유대는 강화되었고, 또한 중국공산당의 실질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김일성을 포함한 최현, 최용건, 김책 등은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며, 이들은 1945년 해방 후 당과 군의 요직을 차지하며 북한 정권 창출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