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조직된 재일조선학생동맹에서 갈라져 나온 세력이 조직한 재일조선인 학생 단체이다. 재일조선학생동맹은 좌우가 대립하여 1949년 5월 총회 이후 분열한다. 이후 우파가 1950년 재일한국학생동맹(이하 한학동)이라는 조직을 결성했고, 민단의 산하 조직이 되었다.
『민주신보』에 따르면, 한학동은 1951년 10월 29·30일 양일 동안 제6회 중앙위원회를 개최하고 1. 대일본 태도문제, 2. 민족문화 앙양에 관한 문제, 3. 조직의 강화, 4. 생활보장에 관한 문제 등에 관하여 진지한 토의를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6항목을 결의했다.
첫째, 재일학도로서 본국에서 싸우는 국군에 대한 격려문 발송, 둘째, 위문문 발송, 셋째, 본국 학생에 대한 서적 발송, 넷째, 본국에 학도사절단 파견, 다섯째, 회담진행기간 중 학생동맹 임시대회를 개최함, 여섯째, 공가(公家)로 된 오사카(大阪) 소재 극동경제부흥사업단의 기술연구소를 학생동맹에서 사용하기로 함 등이다.
한학동은 한국전쟁 시에는 ‘재일한교자원군(在日韓僑自願軍)’에 학도병을 지원시켜 전선으로 보냈다.
1952년 한학동 총회에서는 임시수도 부산에서의 이승만 정권의 강권정치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를 비판하고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리고 이를 이승만 정권에 전달해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1961년 5월 박정희(朴正熙)소장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반군부 쿠데타 성명’을 발표했다. 군사정권을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표명했다. 이후 4.19혁명의 이념을 기본정신으로 하여 각종 정치 활동에 나섰다. 한일회담 반대운동, 입국관리법 반대운동, 민단 내 민주화운동 등 재일조선인 권익 옹호와 본국 내 민주화운동 등을 전개했다.
1972년 7월 민단은 한학동의 산하단체 인정을 취소하여 사실상 추방했다. 이후에도 한학동은 민단 측에 서면서도 한국 군사정권 반대, 본국 학생운동 지원·연대를 표방하는 활동 등을 계속했다고 할 수 있다.
도쿄(東京)에 중앙총본부,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효고(兵庫), 도카이(東海) 지방본부가 있다. 그리고 각 대학 한국문화연구회(약칭 한문연)는 그 지부에 해당된다고 한다. 기관지로 『한국학생신문』이 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