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에 정기용(鄭基用)이 미국 워싱턴에서 처음으로 발행하였다. 정기용은 1964년 6월에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생으로 한일수교 반대 투쟁을 펴다가 대학교를 중퇴하고서 이듬해에 국제자유청년연맹 한국 대표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76년에 박동선사건 당시에는 미국 의회 하원 청문회에서 증언하기도 하였다.
창간 당시에는 4면으로 발행하였는데, 2호부터 8면으로 늘렸다. 크기는 처음에는 가로 22.3㎝, 세로 27.9㎝였다가 1971년 4월부터 가로 29㎝, 세로 40㎝로 늘렸고, 1973년부터는 가로 38㎝, 세로 57.5㎝로 확대하였다.
대체로 매달 한 차례 1일이나 15일에 불규칙적으로 발행되었다. 다만 중요한 사건을 다룰 때는 매달 2회~4회 32면까지 늘려 발행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5000부 정도를 인쇄하였고, 1984년 3월 10일에 마지막으로 제250호를 발행하였다.
창간호에는「교민회에 협조하자」는 사설과 함께 김지하의 시「오적」, 서울 5개 대학 대학생의 선언문 발표 소식, 한인 사회 토막 소식 등을 실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독재 투쟁지’를 자임하면서, 반정부 사설과 함께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 등 미국 언론의 한국 정부 비판 기사를 주로 게재하였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 사건이나 영화감독 신상옥의 미국 망명사건 등 국내에서 보도하기 어려웠던 정치적 비사(秘史)도 다루었다.
이 신문은1970년대 미국 워싱턴 한인 사회의 생활상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당시의미주 지역 유일한 반정부 신문으로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공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