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건국동맹 ()

정치
단체
1940년대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목차
정의
1940년대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개설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에 여운형(呂運亨) 등이 조국 광복에 대비하기 위해 비밀리 조직한 단체이다.

연원 및 변천

1944년 8월 10일에 국내의 사회주의자들이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해방을 대비하기 위해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내세우고 현우현의 집인 서울 경운동 삼광의원(三光醫院)에서 조직한 비밀결사이다. 이여성(李如星)·이만규(李萬珪) 등의 건국동맹 가담으로 조직이 더욱 확대되자 전국적인 조직망을 펴 많은 사람들을 모았다.

건국동맹은 문서로 남기지 않는다는 ‘불문(不文)’, 말하지 않는다는 ‘불언(不言)’,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는 ‘불명(不名)’ 등 3대 원칙을 세웠다. 아울러 각인각파(各人各派)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제의 모든 세력을 구축(驅逐)하고 조선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 반추축(反樞軸) 제국과 협력하여 대일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세력을 박멸할 것, 건설부면(建設部面)에 있어 일체 시위를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농대중의 해방에 치중할 것 등의 3대 강령에 따라 활동하였다.

연맹은 보조단체로 농민동맹, 부인동맹, 청년노동자운동, 학교 학생운동, 철도종업원운동, 교원세포조직운동 등을 직능별 조직으로 두어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또한 식량대책준비위원회와 함께 일본군 후방을 교란하고 군대를 만들 목적에서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특히 결정적 시기에 해외 한인 반일무장역량과 힘을 합쳐 해방을 주체적이고 자주적으로 쟁취하기 위해서 좌우의 이념과 상관없이 해외의 한인 항일단체와 적극적으로 결합을 추진하여, 중국 옌안[延安] 독립동맹과 연계하면서 조선의용군과의 협동 작전을 펴나가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4일에 일본 경찰에 발각된 뒤 조동호·이걸소 등 간부들이 붙잡혀 투옥되었다. 하지만 8월 11일에 일제의 항복을 미리 알고서 이만규가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였고,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여운형 등 몇몇 간부는 출옥 후 치안을 염려하여 건국청년치안대를 결성하였다.

해방 후에는 비밀 조직이었던 탓으로 조직 활동의 혼란과 분열이 일어났다. 8월 15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발족과 더불어 구성원 사이의 공로 다툼으로 조직의 정통성은 깨졌고, 구성원들은 각각 여러 정당과 정파에 흡수되거나 분산되고 말았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된 뒤에는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 별도의 사무실을 설치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파견 구성원과 조선건국동맹본부 고수파가 함께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뒤 건국동맹을 발전적으로 해체한다는 결의에 의하여, 1945년 11월 12일에 조선인민당이 결성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해방삼십년사』(송남헌, 성문각, 1976)
『대한민국정당사』 1(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73)
『몽양 여운형』(여운홍, 청하각, 1967)
『여운형선생투쟁사』(이만규, 민주문화사, 1946)
『조선해방일년사』(민주주의민족전선 편, 문우인서관, 1946)
집필자
이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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