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영 ()

회화
인물
일제강점기 때 산촌한일(山村閑日), 개발지(開發地)의 추(秋) 등 여러 작품을 그리고, 1953년 월북하여 건축미술제작소 미술가로 활동한 한국화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2년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전주
출생지
수원
주요 작품
산촌한일(山村閑日) | 서두수강의 봄 | 고마워라 우리 주권 | 꽃봉오리 | 대극장 면막 원화
주요 경력
동화여자상과학원 미술교사 | 인천 박문여자중학교 교원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때 산촌한일(山村閑日), 개발지(開發地)의 추(秋) 등 여러 작품을 그리고, 1953년 월북하여 건축미술제작소 미술가로 활동한 한국화가.
생애 및 활동사항

이건영은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의 장남으로 1922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1936년 경신중학교에 입학했으나 1938년에 중퇴하고 아버지로부터 전통회화를 배웠다. 6·25때 월북하였다. 18세이던 1939년 제18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산촌한일(山村閑日)」을 출품하여 최연소 입선을 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그 후 1944년까지 연이어 입선하였다. 1941년부터 배렴(裵濂), 심은택(沈銀澤), 이현옥(李賢玉), 정용희(鄭用姬), 박원수(朴元壽) 등과 함께 청전화숙전을 개최하였다.

그는 1942년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개발지(開發地)의 추(秋)」를 출품하여 안동숙(安東淑), 박영선(朴泳善), 박원수(朴元壽) 등과 함께 특선을 수상했는데 이 전람회는 군국주의적 색채가 짙은 공모전으로 김은호(金殷鎬)와 이상범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또 1944년 결전미술전람회(決戰美術展覽會) 일본화부에 「도전하다」를 출품하였다.

1946년 최석재(崔錫在), 김순배(金舜培), 김찬희(金燦熙), 임직순(任直淳), 김기택(金基澤) 등과 함께 순수미술인 단체인 인천미술동인회를 조직하고, 1948년 이석호(李碩鎬), 김기창(金基昶), 정종여(鄭鍾汝), 이팔찬(李八燦), 조중현(趙重顯), 박래현(趙重顯) 등과 함께 동양화연구소를 개설하였다. 같은 해 김기창, 정종여, 박래현 등과 ‘동양화7인전’을 개최하였고 1949년에 개인전을 열었다. 1950년에는 김은호, 이응노(李應魯), 장우성(張遇聖) 등과 ‘신작두방전(新作斗方展)’을 개최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 서울미술제작소에서 활동하다 국군에 체포되었고, 1953년 월북하여 건축미술제작소 미술가로 활동하였다. 「서두수강의 봄」(1955), 「고마워라 우리 주권」(1957), 「꽃봉오리」(1958), 「대극장 면막 원화」(1960) 이후의 작품 활동은 알려지지 않았다.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
『한국미술100년』(국립현대미술관, 한길사, 2006)
『자유신문』(1948.9.24/ 1948.12.1)
『매일신보』(1939.5.30/ 1942.11.3)
집필자
김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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