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황해도 원산에서 출생하여 함남 단천에서 성장했으며, 단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서울에서 영어 강습을 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두루 경험을 쌓았고, 1923년 함흥에 공연 온 극단 예림회(안종화 단장)에 입단하여 간도 순회공연에 참여하면서 연극계에 입문했다.
예림회 해산 후인 1924년에는 일본인들이 부산에 설립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들어가 이경손, 주인규, 나운규 등과 엑스트라로 출연했고, 1925년 창립된 윤백남프로덕션의 첫 작품 「심청전」(이경손 감독, 1925)에도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그러나 고려키네마의 「개척자」(이경손 감독, 1925)에서는 비중있는 배역을 맡았는데, 이 영화부터 남궁운이라는 예명을 쓰기 시작했다. 이어서 1926년에 「장한몽」(이경손 감독), 「아리랑」(나운규 감독), 「풍운아」(나운규 감독), 1927년에는 「낙원을 찾는 무리들」(황운 감독)에서 잇달아 비중있는 배역을 맡아 영화배우로서 이름을 알렸다. 「뿔빠진 황소」(1927)에서는 감독, 각색, 주연을 맡았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낙원을 찾는 무리들」, 「뿔빠진 황소」는 카프 동반계열 작품으로 분류되는데, 이 시기부터 그가 좌파 사상에 공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좌파 영화인 김유영, 임화 등과 교유하면서 본격적인 좌파 예술운동에 뛰어들어 신흥영화예술가동맹(1929)의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1931년에는 임화, 안막, 김남천, 이규설 등과 함께 극단 청복극장을 창립, 프로극운동을 시작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공연은 올리지 못했다.
1932년 흥남질소비료공장을 배경으로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린 영화 「딱한 사람들」(황운 감독) 제작에 관여했다. 또한 좌파 극단인 신건설, 동방키노 등에 참여하다가 1933년 나웅, 강호, 추적양, 이상춘 등과 함께 구속되었다. 출감한 이후 동양극장의 전속작가, 극단 인생극장 등에서 활동했고, 1941년부터는 아랑의 극작, 연출 등을 맡는 등 아랑을 주도했다. 1941년에는 아랑의 「신도」(이서구 작),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임선규 작)를 연출했고, 아랑의 대표작 「성길사한」(안영일 연출)의 극작을 맡았다.
이후 1940년대 전반 친일 희곡들을 대거 집필하였다. ‘총후 국민의 시국정신’을 앙양할 목적으로 1941년 극단 성군에서 「백마강」을 집필하였고, 1942년 근로보국대를 미화하고 선전한 극본 「행복의 계시」를 집필하였다. 또한 1943년 극단 태양에서 ‘반미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의 연극 「그 전날 밤」의 극본을 집필하였으며, 1944년 징병을 선전한 극본 「성난 아시아」를 공동집필하였다.
광복 직후 좌파 진영인 조선연극건설본부, 조선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을 거쳐, 두 조직이 통합된 조선연극동맹에서 좌파 극작가로 활동했다. 1945년 7월 송영, 안영일, 김일영 등과 함께 극단 조선예술극장을 창립했고, 1946년에는 「임진왜란」(안영일 연출)의 극본, 1947년 「세 동무」(박춘명 연출), 「임자 없는 소년들」(박춘명 연출)의 극본을 썼다. 1947년 「시집가는 날」(오영진 작)을 연출한 후 월북했다. 북한에서 1948년 「리순신 장군」을 창작해 호평을 받았으나, 1949년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연극, 영화계에서 배우, 연출가, 극작가, 비평가로 활동한 전방위 예술가였다. 1920년대 무성영화 시절의 주요 배우로서 그리고 경향파 영화와 프로연극계에서 극작가, 연출가로 활동했다. ‘남궁운’이란 예명은 주로 영화작업, 배우로 활동할 때 썼고, 김태진이란 이름은 극작, 연출, 비평 등 연극 활동을 할 때 사용했다. 1940년대 전반 국민연극 시기에는 친일 희곡들을 썼고, 광복 이후에는 좌파 연극진영에서 극작, 연출, 이론가로 활동했다. 북한에서는 그를 사회주의 사실주의 연극과 영화에 기여한 예술가로 평가한다.
김태진의 일제시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4: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428~442)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