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출생으로, 본명은 이순재(李順載)이다. 배재고보 연극부에서 김동원 등과 활동했다. 일본에서 3년간 수학한 뒤 서울로 돌아와 1931년 ‘영화시대’에 입사했다. 1938년 「한강」(방한준 감독)의 각색을 맡아 시나리오작가 활동을 시작했으며, 1939년 『조선일보』 시나리오 현상공모에서 「드메」로 1등에 당선되었다. 이어서 「성황당」(방한준 감독, 1939)의 각색으로 인정을 받았다.
1939년 조선문화영화협회 제작의 군국주의 영화 「국기 아래서 나는 죽으리」, 1940년 「바다의 빛」을 연출하면서 영화 감독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김유영 감독의 영화 「수선화」의 각색을 맡았다.
영화계에서 주로 활동하던 이 시절에는 이익이란 필명을 사용했으나, 1940년대에 연극, 악극 분야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김화랑이란 예명을 사용했다. 1942년 박구, 안익조가 세운 신흥악극단의 문예부에 참여하여 악극 대본 극작 및 연출 활동을 했다. 1943년 손일평, 곽태용, 정유웅, 양석천 등과 유락좌를 창단하여 악극 대본을 썼고, 당대 스타 가수인 신카나리아와 결혼했다. 1943~1944년까지는 라미라가극단에서 극작, 연출을 했다.
해방 후에는 대도회악극단, 무궁화악극단, 새별악극단, 백조악극단, 국도악극단, 수도악극단 등에서 극작 및 구성, 연출가로 활동했다. 1946년 KBS에서 김희창, 한운사 등과 함께 방송작가로 활동하기도 했고, 6·25전쟁 기에는 아내 신카나리아와 함께 국방부 정훈국 문예중대에 편입되어 종군 연예활동을 했다. 1952년 부산에서 악극단 호화선을 창립, 부산극장에서 「굳세어라 금순아」를 공연했고, 이때 황해와 백설희가 명연기를 펼쳤다. 이후 악극 「밤에 우는 새」, 「낙동강 칠백리」, 쇼 「연애할 시간도 없다」, 악극 「혈투」, 「사랑과 죄」 등을 직접 각색, 연출했다. 1954년 환도하여 국도극장에서 그랜드쇼 「춤추는 호화선」을 공연했고, 임화수가 창설한 한국연예주식회사의 문예부 책임자를 맡기도 했다.
1950년대 후반 악극이 쇠퇴하고 영화가 부흥하자 다시 영화계로 돌아와 약 30여 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악극단에서부터 희극에 가까운 코믹 터치, 명랑한 촌극무대, 슬랩스틱(slapstick) 무대구성에 장기를 보여왔던 그는 1950년대 말에는 코미디언들을 내세운 영화들을 만들어 인기 몰이를 했다. 홀쭉이(양석천)와 뚱뚱이(양훈)란 예명으로 유명한 콤비 코미디언을 기용하여 「사람 팔자 알 수 없다」(1958), 「홀쭉이 뚱뚱이 논산훈련소에 가다」(1959) 등의 캐릭터 코미디를 만들었다. 그 외에 「오형제」(1959), 「아내를 빼앗긴 사나이」(1962), 「살살이 몰랐지?」(1966), 「 남정임 여군에 가다」(1968) 등을 연출했다. 1970년대 초까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다가, 1977년 고혈압으로 급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