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석영 ()

연극
인물
해방 이후 서울시 예술위원, 문교부 예술위원, 국립극장 위원 등을 역임한 작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1년(고종 38)
사망 연도
1950년 2월 24일
출생지
서울
목차
정의
해방 이후 서울시 예술위원, 문교부 예술위원, 국립극장 위원 등을 역임한 작가.
생애 및 활동사항

1901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안석주(安碩柱)이다.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휘문고보에 입학했다. 재학 중 장발(張勃) 등과 함께 ‘고려화회’를 조직하고, 고희동으로부터 본격적인 서양화 수업을 받았다. 졸업 후 일본에 건너가 ‘동경 혼고(本鄕) 양화(洋畵)연구소’에서 미술 수업을 받다가 병약해져 1921년 귀국했다. ‘서화협회’에서 김동성으로부터 노수현, 이상범 등과 함께 만화를 배웠다. 나도향의 『동아일보』 연재소설 「환희」(1922~23)의 삽화를 그리면서 한국 삽화계의 선구자가 되었다.

연극배우로서의 활동은 1921년 이기세가 주도하는 예술협회의 공연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1922년 홍사용, 이상화, 박영희, 나도향 등과 ‘백조’ 동인으로 참여했고, ‘백조’가 후원하는 극단 토월회에 가입하여 2회 공연 「부활」(1923)의 주인공 네프류도프 역을 맡아 호평을 받았다. 휘문학교 미술교사를 하면서, 1923년 7월 토월회의 무대미술을 담당하였고, 8월에는 김복진, 김기진 형제와 함께 토월미술연구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백조’ 동인 중 김복진, 박영희, 김기진 등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을 목표로 한 파스큘라(PASKYULA) 창립동인으로 참여(1923)한 후 다시 도일(1924)하여 미술 수업을 마치고 귀국했다. 1925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만화 「허풍선이 모험기담」, 「바보의 하로일」, 「엉터리」 등을 연재했다. 같은 해 연말에는 『시대일보』로 자리를 옮겼다. 1925년 4월 김복진, 이승만 등과 함께 ‘조선만화가 구락부’를 조직했고, 8월 김복진, 박영희, 김기진 등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을 조직, 6인의 중앙위원 중 한 명으로 선임되었으며, 기관지 『예술운동』의 삽화를 그렸다. 1927년 신간회 창립 당시 간부로 참여했고, 1928년 『조선일보』 학예부장이 되었으며, 벽초 홍명희의 연재소설 『임꺽정』의 삽화를 그렸다. 1931년 카프 제2차 방향전환 때 박진명, 강호, 이갑기 등에 의해 제명처분을 당했다. 그러나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서 사회비판적 내용을 다룬 만문만화, 미술평론, 소설, 시, 삽화, 연극평론, 시나리오 등을 왕성하게 발표했다.

그가 영화계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27년 심훈의 「어둠에서 어둠으로(먼동이 틀 때)」에서 미술감독과 주연을 맡으면서부터였다. 1930년 서광제, 이효석, 안종화, 김유영 등과 ‘조선시나리오라이터협회’를 창립하였고, 1934년 자신의 시나리오 「춘풍」이 박기채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자 조선일보사를 그만 두고 영화계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37년 첫 영화 「심청전」을 감독하였고, 1940년 최남주의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전속 감독으로 입사했다. 이후 친일 영화인 「지원병」(1941), 「흙에 산다」(1942)를 연출했다.

1940년 조선영화인협회의 상무이사를 맡았으며, 같은 해 내선일체를 이루기 위해 황도학회에 영화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 외에도 근로문화인부대활동,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등의 친일활동을 하였다. 해방 직후 ‘조선영화건설본부’(1945.8)의 내무부 부장을 맡았고, 이후 개편된 조선영화동맹의 중앙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 ‘영화감독 구락부’를 결성했고, 좌익의 ‘문화단체 총연맹’에 대항하여 1947년 2월 출범한 우익 문화단체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에 참여했다. 1947년 KBS의 3·1절기념 어린이 노래극 「우리의 소원은 독립」에 주제가 ‘우리의 소원’을 작사했고, 이 시에 장남 안병원이 곡을 붙여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해방 이후 주로 중앙일보사 고문 등 언론계, 문화계에서 활동하다가 지병으로 1950년 2월에 사망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다재다능을 보여준 전방위 예술가이지만 특히 그가 대중문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삽화가·만화가로서의 위상 때문이다. 그는 춘원 이광수, 나도향, 이무영, 박종화, 홍명희 등의 소설에 삽화를 그렸고, 한국 최초의 아동만화인 「씨동이의 말타기」를 발표했으며, 「개벽」, 「백조」, 「학생」, 「어린이」, 「별건곤」 등의 표지 삽화도 그렸다. 특히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만문만화를 그렸는데, 이는 식민지 조선의 근대 풍경을 매우 잘 담아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 』 2 (민족문제연구소, 2009)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신명직, 현실문화연구, 2003)
집필자
김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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