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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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충청남도 천안의 아우내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순국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5년 1월 5일
사망 연도
1919년 4월 1일
출생지
충청남도 천안
대표 상훈
대통령표창|건국훈장 애국장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박병호는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1일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 아우내 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동면 화계리 주민들과 함께 참가하였다. 약 3,000명의 군중들이 시장 일대를 활보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 헌병들과 대치하며 시위에 참여하다가 헌병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충청남도 천안의 아우내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순국한 독립운동가.
주요 활동

1919년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葛田面) 병천리(並川里) 아우내 장터에서 약 3,000명의 대규모 군중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천안 군내에서는 3월 28일부터 매일같이 천안, 입장(笠場), 풍세(豊歲) 면내에서 독립만세와 횃불 독립만세를 외치는 독립운동이 있었다.

특히 갈전면에서는 4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하기 수일 전부터 밤마다 읍내를 중심으로 고지(高地)에서 불을 지피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횃불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또한,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는 계획이 실행되고 있었다.

경성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던 유관순(柳寬順)이 동면(東面) 용두리(龍頭里) 본가로 귀가해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작은아버지 유중무(柳重武) 등에게 경성의 독립운동 상황을 전하고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주창하였다. 이들은 조인원(趙仁元) 등과 협의하여 독립만세를 준비하며 면내 마을 주민들에게 참가를 권유하였다.

갈전면에서는 김구응(金球應), 김상철(金相喆), 박종만 등이 활동하였다. 한편, 수신면(修身面)에서는 홍일선(洪鎰善)이 김교선(金敎善) · 한동규(韓東奎) · 이순구(李旬求), 성남면(城南面)의 이백하(李伯夏) 등과 협의하여 독립만세를 결의하였다.

4월 1일 주도 인사들은 각각 동지들과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병천 아우내 장터로 모여들었다. 박병호는 동면 화계리(花溪里) 주민들과 함께 참가하였다. 장날을 맞아 병천 헌병주재소 헌병 5명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하여 아침부터 경계를 강화하며 시장 일대를 순시하였다.

오후 1시경 조인원 등의 무리가 먼저 태극기를 흔들며 장터 시장 군중 500~600명과 독립만세를 외쳤다. 김교선, 김상철, 김구응, 박종만 등이 주도적으로 합세하여 약 3,000명의 군중들이 시장 일대를 활보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세 함성에 놀란 헌병들이 출동해 즉시 해산을 명령하였지만, 군중들은 불응하며 계속 만세를 고창하였다.

헌병들이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들을 이끌던 기수(旗手)들을 향해 총칼을 휘두르고 군중들에게 사격을 가하였다. 사상자가 발생하므로 일시 해산했던 군중들은 사상자들을 수습하고 재집결하여 주재소로 갔다. 군중들은 헌병들에게 무력 집압을 항의하고 윽박하거나 구타하며 주재소를 공격하여 파괴하였다.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어 위급함을 느낀 헌병들이 군중들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감행하므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헌병들의 무자비한 진압에도 군중들은 주재소를 벗어나 주재소와 시장 근처의 고지에 집결하여 다시 공격할 기회를 보았다. 일부 군중들은 우편소와 면사무소로 이동하여 시설물들을 파손시켰다.

병천의 급보를 접한 천안철도엄호대(天安鐵道掩護隊)의 보병과 헌병들이 오후 4시경 병천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주재소 헌병들이 지원 병력과 합세하여 군중들을 해산시키려고 다시 사격을 가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해산하여 귀가하지 않고 읍내 주위의 높은 여러 곳에서 사태를 지켜보았다.

3차례에 걸친 헌병들의 무력 진압으로 60여 명이 사상(死傷)을 당하였고 박병호도 헌병들의 무력 진압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대정8년소요사건에 관한 도장관보고철(道長官報告綴)」
「불령단관계잡건(不逞團關係雜件)-조선인의 부 재내지 4」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단행본

김병조, 『한국독립운동사략』 상(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8)
『한일관계사료집』(『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7, 국사편찬위원회, 2005)
이정은, 『유관순』(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독립유공자공훈록』 3(국가보훈처, 198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국가보훈처, 1971)
이용락, 『3 · 1운동실록』(삼일동지회, 1969)
김승학, 『한국독립사』 하(독립문화사, 1965)
이병헌, 『3 · 1운동비사』(시사시보사, 1959)
문일민,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원호회, 1956)
김병조, 『한국독립운동사략』 상(선언사, 1921)

신문 · 잡지

『신한민보』(1919. 9. 2.)
『신한민보』(1919. 5. 27.)

판결문

「판결문」(고등법원, 1919. 9. 11.)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19. 7. 4.)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19. 6. 30.)
「판결문」(공주지방법원, 1919. 5. 21.)

인터넷 자료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집필자
김진호(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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