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호는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1일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 아우내 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동면 화계리 주민들과 함께 참가하였다. 약 3,000명의 군중들이 시장 일대를 활보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 헌병들과 대치하며 시위에 참여하다가 헌병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1919년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葛田面) 병천리(並川里) 아우내 장터에서 약 3,000명의 대규모 군중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천안 군내에서는 3월 28일부터 매일같이 천안, 입장(笠場), 풍세(豊歲) 면내에서 독립만세와 횃불 독립만세를 외치는 독립운동이 있었다.
특히 갈전면에서는 4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하기 수일 전부터 밤마다 읍내를 중심으로 고지(高地)에서 불을 지피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횃불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또한,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는 계획이 실행되고 있었다.
경성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던 유관순(柳寬順)이 동면(東面) 용두리(龍頭里) 본가로 귀가해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작은아버지 유중무(柳重武) 등에게 경성의 독립운동 상황을 전하고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주창하였다. 이들은 조인원(趙仁元) 등과 협의하여 독립만세를 준비하며 면내 마을 주민들에게 참가를 권유하였다.
갈전면에서는 김구응(金球應), 김상철(金相喆), 박종만 등이 활동하였다. 한편, 수신면(修身面)에서는 홍일선(洪鎰善)이 김교선(金敎善) · 한동규(韓東奎) · 이순구(李旬求), 성남면(城南面)의 이백하(李伯夏) 등과 협의하여 독립만세를 결의하였다.
4월 1일 주도 인사들은 각각 동지들과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병천 아우내 장터로 모여들었다. 박병호는 동면 화계리(花溪里) 주민들과 함께 참가하였다. 장날을 맞아 병천 헌병주재소 헌병 5명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하여 아침부터 경계를 강화하며 시장 일대를 순시하였다.
오후 1시경 조인원 등의 무리가 먼저 태극기를 흔들며 장터 시장 군중 500~600명과 독립만세를 외쳤다. 김교선, 김상철, 김구응, 박종만 등이 주도적으로 합세하여 약 3,000명의 군중들이 시장 일대를 활보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세 함성에 놀란 헌병들이 출동해 즉시 해산을 명령하였지만, 군중들은 불응하며 계속 만세를 고창하였다.
헌병들이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들을 이끌던 기수(旗手)들을 향해 총칼을 휘두르고 군중들에게 사격을 가하였다. 사상자가 발생하므로 일시 해산했던 군중들은 사상자들을 수습하고 재집결하여 주재소로 갔다. 군중들은 헌병들에게 무력 집압을 항의하고 윽박하거나 구타하며 주재소를 공격하여 파괴하였다.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어 위급함을 느낀 헌병들이 군중들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감행하므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헌병들의 무자비한 진압에도 군중들은 주재소를 벗어나 주재소와 시장 근처의 고지에 집결하여 다시 공격할 기회를 보았다. 일부 군중들은 우편소와 면사무소로 이동하여 시설물들을 파손시켰다.
병천의 급보를 접한 천안철도엄호대(天安鐵道掩護隊)의 보병과 헌병들이 오후 4시경 병천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주재소 헌병들이 지원 병력과 합세하여 군중들을 해산시키려고 다시 사격을 가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해산하여 귀가하지 않고 읍내 주위의 높은 여러 곳에서 사태를 지켜보았다.
3차례에 걸친 헌병들의 무력 진압으로 60여 명이 사상(死傷)을 당하였고 박병호도 헌병들의 무력 진압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