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농민시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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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사건
1989년 2월 13일 여의도에서 열린 ‘부당수세 폐지 및 고추 전량수매 쟁취 전국농민대회’.
이칭
이칭
죽창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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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89년 2월 13일 여의도에서 열린 ‘부당수세 폐지 및 고추 전량수매 쟁취 전국농민대회’.
내용

농민들은 1987년의 고추 값 폭락과 수세제도의 불합리성 및 농지개량조합의 비민주적 운영에 항의해 본격적인 대중투쟁으로서 수세투쟁과 농산물 제값받기 투쟁을 전개했다. 농민들은 1988년 11월 1일 전국수세폐지대책위원회 등을 꾸리고, 수세폐지와 고추전량 수매를 위한 투쟁을 전국 각지에서 400여 차례나 전개했다.

1988년 노태우 정권 등장 이후 여소야대 상황에서 추곡수매에 대한 국회동의제가 실시되었고, 농산물 제값받기 투쟁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지만, 이러한 문제점은 시정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추 값은 나날이 폭락했다. 정부의 저곡가정책에 분노한 농민들은 국회개원 시기에 맞춰 자신들의 절박한 생존문제를 대대적으로 알리기 위해 여의도 광장에서 농민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1989년 2월 13일 전국 99개 군 농민 1만 5,000여 명이 여의도 광장에 모여 ‘부당수세폐지 및 고추전량수매 쟁취 전국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는 서부의 평야지역 연합과 동부의 중산간 지역 고추 주생산지가 연대해, 그동안 투쟁해 온 것을 서울에서 총집결한 대규모 집회였다.

이 집회에는 전국농민운동연합·가톨릭농민회·한국기독교농민회 등의 3개 농민단체와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학생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집회를 마치고 4당 대표와 대책을 토론하기 위해 국회의사당 쪽으로 행진했다. 그러나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자 분노한 농민들은 만장이나 깃발을 달기 위해 가져 온 대나무로 죽창을 만들어 이에 대항하면서, KBS·정부 업무수행 차량을 불태우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때문에 이날의 시위는 ‘죽창시위’로 불렸다.

정부는 농민운동 지도자와 민족민주운동세력에 대한 검거령을 내리는 한편 전국에서 총 458명을 연행해 117명을 입건하고 6명을 구속했다. 이에 농민들은 2월 25일 ‘여의도 농민집회 폭력진압 규탄과 수세 완전폐지를 위한 전국농민대회’를 26개 군에서 동시에 개최하면서 투쟁했으나, 정권의 대대적인 탄압은 농민운동을 위축시켰고, 가톨릭농민회 등은 배후세력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농민문제의 심각성을 국민들이 공감하게 되었고, 수세인하의 성과도 이루게 되었다.

참고문헌

『한국민주화운동사』3(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 돌베개, 2010)
『한국사』20(강만길 외, 한길사, 1994)
「60개 군 농민 서울서 시위, 국회가다 경찰과 충돌도」(『동아일보』, 1989.2.14.)
집필자
유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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